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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읽을 때 네 가지 원칙



I. 성서는 하나님의 사건, 역사하심을 증언한 신앙 고백의 책입니다.

     "성서란 무엇일까요?" 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인간들이 역사 가운데 어려움에, 고통에, 죄 가운데 빠져 있을 때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고 개입해 오셔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고백적으로 증언한 책입니다. (출애굽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 찬양을 보십시요 출 15,1-18;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의 노래 출 15,21; 마리아의 찬가 눅 1,46-55)

     그러므로 성서를 대할 때 신앙고백의 글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가 세상의 창조, 인류의 근원을 다루고 있다고 해서 이것을 요즘 과학에서 말하는 창조이론들과 비교하여 이론 중 이 부분은 성서 창조기사의 이 구절을 뜻하고 또 저 부분은 저 구절을 의미한다고 직접 대입시키면서, "그러니까 성서에서 말하는 창조기사가 옳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서가 신앙고백의 글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서는 과학책이 아닙니다. 성서는 고백의 글입니다. 예를 들어 깊은 산골에 갑순이과 갑돌이가 살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하루는 갑돌이가 갑순에게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갑순아 난 너를 사랑한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이 말은 참말 일까요 거짓일까요. 사랑의 고백이라는 입장에서는 참입니다. 왜냐하면 갑순이를 사랑하는 갑돌이 눈에는 그녀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게 보이니까요. 그러나 과학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갑돌이는 세상의 모든 여자들과 갑순이를 비교한 끝에 내린 결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백의 글과 과학의 글은 그 정신이, 출발점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서로 비교시키면서 어느것이 진짜냐고 물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핵심은 세상의 창조, 인간의 창조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임을 말합니다. 인간은 우연이나 우발적을 생겨난 존재가 아님을 고백합니다. 첫 날에는 무엇을 창조했고 둘 째 날에는 무엇을 창조했다는데 (고백의 언어) 지구의 역사를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첫 날"은 어디에 해당하고 "둘째 날"은 어디에 (혹은 몇 만 년에) 해당한다고 (과학의 언어)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많습니다. 거기에는 (성서의 참됨을 수호하려는 충정에서) 무리한 논리로 둘을 같다고 결론내릴 위험도 있고, 만일 이 비교가 서로 맞지 않는 다고 할 때 "성서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거짓이다"라는 잘못된 결론에 다다를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3-4000년 전의 사고관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내용을 직접 현재의 진보된 학문, 과학, 세계관과 비교하기 보다는 오늘날 과학적인 세계관으로 그 창조의 고백을 풀어 설명하는 것이 더 올바른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성서는 역사책도 아닙니다. 물론 성서 중에는 역사가에 의해 기록된 글도 있지만 (왕 상하, 대 상하)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구원의 역사'라는 신앙의 입장으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모든 성서는 신앙 고백의 차원에서 쓰여 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신문기사처럼 소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사실'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을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쓴다고 하는 '실증주의'는 역사학자 랑케 이래로, 즉 근대에 생겨났습니다. 이와 달리 성서는 많게는 3-4000년 전에 적게는 2000년 전에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성서에 따라서 차이는 있지만 성서는 (복음서의 경우) 고백을 직접 썼다기 보다는 먼저 단편적인 고백들, 이야기들, 증언들이 있었고 이것들을 나중에 모으고 정리해서 글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묘사가 있다고 해서 "성서는 거짓이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무덤에 찾아갔던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기사가 매 복음서에 나옵니다. 마 28,2에는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흰 천사로, 막 16,5에 흰 옷입은 한 청년으로, 눅 24,4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요 21,12에는 흰 옷입은 두 천사로 묘사됩니다. (이런 유사한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실증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우리들은 쉽게 "그럼 실제로 어떤 천사가 몇 명 나타났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는 잘못하면 "성서에 서로 모순되는 보도가 있으니 성서는 믿을 수 없다"는 결론에 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성서는 그러나 그런 실증주의적인 사고, 요즘 신문에서 보도하는 신문기사처럼 예수님의 빈무덤 사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실증주의 정신은 근대 이후의 사고입니다. 성서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고백하고 계십니다. 그 이외의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성서는 지금 여기서 무엇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는 지를 집중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부차적인 것이 매달리면 잘못된 결론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고백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오늘날의 과학책이나 역사책, 신문보도 처럼 여기고 접근해서는 않됩니다.

II.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봅니다.

     우리 속담에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개별적인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입장에서도 그 사물을 조망해 봐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속담은 성서을 읽을 때도 적용됩니다. 각 성서로 들어가 어떤 구절을 볼 때 그 한 구절에만 몰입하여 빠져버리면, 차칫 성서가 전체로 말하는 시야를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럴때 그 구절이해는 잘못된 것이 되고 맙니다. 항상 부분은 전체의 입장에서 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롬 7,12에서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의거해서 누가 "바울의 율법이해는 매우 긍정적이다"라고 한다면, 전에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주장은 의문의 소지가 많습니다. (갈 2,11-3,29을 보십시요)

     어떤 구절을 볼 때 항상 전체 속에서 이 부분을 이해해야 합니다.

III. 각 성서가 쓰여진 시대배경을 살펴봅니다.

     우리가 텔레비젼에서 사극을 본다고 할때 당시의 시대 상황를 잘 알고 있다면 내용이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고 더 재미있게 시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서를 읽을 때도 그 글이 쓰여진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다면 더욱 그 말씀은 읽는 우리에게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 쪼개"는 (히 4, 12) 능력의 말씀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당시 예수님께서 사셨던 중근동 팔레스틴의 사회, 경제, 정치적인 상황들을 많이 안다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당시 사람들의 심정들, 제자들의 마음들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의미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복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드셨던 비유들의 의미가 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처했던 상황을 알게 되면, 그가 극복하려했고 문제, 그가 필생의 화두로 삼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이라는 문제가 무엇인지 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마태는 어떤 정황에서 처해있었기 때문에 새 율법이해를 가지고 (마 5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했는지 를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IV. 그리고 우리 현재 상황에 비추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일 지를 찾습니다.

     마지막으로 적용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는 것은 공덕을 쌓으려고가 아닙니다. 부적처럼 늘 지니고 있거나, 하루에 몇 장씩 읽기만 하면 액이, 화가, 병마가 침입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현재 우리가 처한 이 상황에서 (새 천년을 눈 앞에 앞둔 이 시점, 남북의 통일이 아직 해결 되기 못한 채, 남쪽은 부의 불균형, 사회 전반에 걸쳐 공정한 룰의 부재, 정의의 상실, 부패와 이기심이 팽배하고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있고 북은 북대로 경직된 이데올로기, 극도의 비효율적인 통제경제 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서 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빛과 소금의 역할의 하고 사는 것이 어떤 삶을 의미하는 지를 깨닫기 위해서 입니다. 아니면 어떤 개인적인 선택의 순간에 어느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인 지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서를 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이라고, 이렇게 하라고 기계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서는 나의 특수한 경우를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스라엘을 예를 들어, 혹은 2000년 전 초대교회 때를 예로 들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였나를 말씀하십니다. 즉 성서가 쓰여진 상황과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다릅니다. 그때의 문화나 풍습도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본처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하갈을 후처로 택해서 자손을 취합니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요즘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요즘 누가 주장하기를 "자기는 계시를 받았는데 자식을 재물로 바치라고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된 계시가 아닐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대로 돼지고기를 않먹는다.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비성서적으로 사는 이들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가 바르게 성서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고전 14장에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이 말에 근거해서 요즈음 어느 교회에서 여자들에게 아무 직분도 주지 않고 투표권이나 모든 것을 박탈한다면 이도 바른 성서관에서 나온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이미 여자 선지자,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활동이 너무 활발하여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차원으로까지 사건이 비화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전적으로 교회 내 모든 여인들의 언로, 권리를 박탈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석학자에 따라서는 이 본문을 후대의 삽입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먼저, 전체 성서의 정신이 무엇인 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파악한 성서의 정신에 비추어 그러면 지금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것일 지를 판단해야 (한 번 걸러서) 합니다. 성서의 상황과 나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면서 성서의 핵심을 뽑아내고 그 핵심과 원리에 비추어 내 상황, 나의 싯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가 혼자 "이런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고 판단한 것이 실제로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잘못 판단할 위험). 그러므로 성서는 함께 읽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성서를 읽고 공부하는 모임을 통해). 함께 읽으면서 각자 처한 문제들, 상황들을 서로 이야기 하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이고, 다른 사람이 거기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인지 서로 의견을 나누고, 그 모임을 인도하는 목사님등 에게서 성서에 대해 배우고, 같이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고 관련된 주석책이나 신앙의 책을 찾아보고 하는 과정을 통할 때 지금 내 상황에서 하나님이 과연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즉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를 읽을 때 네 가지 원칙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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