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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 결단, 전적인 신뢰로서의 믿음 (마태-5)

머릿글

이제부터는 '마태연재 1'의 처음에서 밝힌 대로 마태복음에서 몇 가지 주제를 골라 다루어 보려 합니다. 대략 1. 마태의 믿음이해, 2. 응보, 보상 이해, 3. 하나님나라, 하늘나라, 4. 마태공동체가 보편적인 성격을 가졌는 지 여부 등 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제로 말씀드릴 것은 앞으로 진행되는 글에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이론을 답습하기 보다는, 본문 자체를 살피면서 거기서 직접 해답을 쁹으려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얻은 결론이 엉성하다 할 지라도 오히려 귀한 것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첫 번 째로 마태복음에 나타나 있는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인 지를 살펴봅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여타 복음서의 믿음이해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은 믿음을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마태의 복음이해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자! 그러면 과연 마태복음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을까요?

몸글

I.

먼저 '믿음'과 관련된 단어가 마태복음에서 얼마나 나오는 지 살펴봅시다. '믿는다 (pisteuo)'는 동사는 신약 전체에서 243회 나온다. 그중 마태복음에 11회 (8,13; 9,28; 18,6; 21,22.25.32.32.32; 24,23.26; 27,42), 마가복음에 14회, 누가복음에 9회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무려 98회 나옵니다.

다음으로 '믿음 (pistis)'이라는 명사의 사용에 대해 알아보면 (신약 전체에서 243회) 마태에서는 8회, 마가에서는 5회, 누가에서는 11회, 그리고 요한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충성된 (pistos)"이라는 말은 (전체 신약에서 67회 사용) 마태에서 5회 (24,45; 25,21 2회; 25,23 2회), 마가에서는 사용되지 않고있으며, 누가에서 6회, 요한복음에서는 1회 등장한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믿음'과는 다른 뜻으로 ("충성된 종")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선 다루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 (apisteo)"라는 동사는 전체 신약성서에서 8회, 그 중 공관복음서 (마, 막, 눅) 에서는 오로지 막에 2회 (16,11.16) 그리고 눅에 2회 (24,11.41) 나온다. 그러므로 이 단어도 살피지 않는다.

"믿지 않음 (apistia)"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11회 나오는데 마태에서 1회 (13,58; 사본에 따라서 17,20도) 마가에서는 3회 (6,6; 9,24; [16,14]) 나온다.

단어 "믿음이 없는 (apistos)"은 신약전체에서 23회 나오는데, 마에서 1회 (17,17), 막에서 1회 (9,19), 눅에서 2회 (9,41; 12,46), 요한에서 1회 (20,27) 나온다.

"믿음이 적음 (oligopistia)"는 전 신약성서에서 오직 마태에서 1회 (17,20) 나온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oligopistos)"이라는 단어는 전 신약성서에서 5회, 그 중 마태에서 4회 (6,30; 8,26; 14,31; 16,8), 누가에서 1회 (12,28) 나온다.

II.

윗 통계에 나온 각 단어의 사용 예를 검토해 봄으로써 마태는 과연 '믿음'을 무엇이라고 하는 지 알아봅시다.

먼저, (1) 마태복음에서 '믿음'은 (예수님의) 기적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믿음이란 '(예수께서) 병을 고칠 것, 이적을 행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pisteuo 8,13; 9,28; pistis 8,10; 9,2.22.29; 15.28; 17,20; 21,21; apistia 13,58 [17,20]: oligopistia 17,20; oligopistos 8,26; 14,31; 16,8). (2) 다음으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pisteuo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pistis 23,23; apistos 17,17; oligopistos 6,30; 8,26 [이 구절은 예수님의 기적과 관련될 수 도 있다]. (3) 또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pisteuo eis 18,6; pisteuo epi 27,42). (4) 마지막으로 '믿는다'는 어떤 사람의 가르침을 진실이라고 인정하는 것 (예: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것이요" 21,25), 혹은 어떤 말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예: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23) 사용되기도 한다 (pisteuo 21,25.32.32.32; 24,23.26). 이 항목은 우리가 검토하려는 '믿음'과 상관이 적음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같은 분류에서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예수님의 이적과 관련해 볼 때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믿음을 갖게 해 주시지 않는다. 믿음은 거기에 이미 전제되어 있다. 그들은 이미 (예수께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께 온다. 그리고 이 믿음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적을 (치유) 베푸신다. 그들이 믿음을 갖지 않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권능을 행하실 수 없다 (13,58). 이런 점에서 볼 때 여기서의 믿음이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정위된 믿음과 그 의미가 다르다. 즉 예수님의 이적, 특별히 치유와 관련된 구절에서 믿음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자신들이 처한 악의 현실을 (병, 신체적 결함, 귀신들림) 선의, 새 현실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즉, 이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여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악의 세력들을 멸하시고 모든 권세를 갖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스도를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새 현실이 이루어 진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전적으로 거기에 의지해 사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 이에 대한 신뢰가 있는 자에게는 병이 낳고, 구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 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적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믿음(1)은 전적인 신뢰인 믿음(2)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 21,21 이하에서도 기적행위와 신뢰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내가 진실로 ... 이르노니 ...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 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이런 연장선 상에서 믿음은 그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구절이 마태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각 pisteuo eis로 (18,6), 그리고 pisteuo epi로 (27,42) 1회 씩.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동사와 관련해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한번도 나오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막 9,42를 개역이나 새 표준 새번역, 공동번역으로 보면 "나를 믿는" 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표준 새번역 관주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고대사본들 중에서 이 말이 없는 것도 있으며, 이런 사본들이 사본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22,67에서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믿음'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 그리스도' 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다시 마태로 돌아가서,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쓰여진 두 가지 구문 'pisteuo + eis + 4격 목적어' 와 'pisteuo + epi + 4격 목적어'의 차이가 무엇인 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pisteuo + epi + 4격 목적어'는 잘 쓰여지지 않는 구문이라는 것은 지적될 수 있다 (4복음서에서 마 27,42가 유일). 부언하자면 'pisteuo + epi + 3격 목적어'는 4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눅 24,25에 나온다. (참고 J. Jeremias, Art. lithos ktl., ThWNT 4, 275, 37ff; A. Weiser/ R. Bultmann, Art. pisteuo ktl., ThWNT 6, 217f) 그러나 이 구절은 예수와 상관이 없다. 이와 달리 'pisteuo + eis + 4격 목적어'는 공관복음서에서는 유일하게 마18,6에 나오지만 요한복음서에서는 38회나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1,12),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3,16) 등. 그러므로 'pisteuo + eis + 4격 목적어'는 현재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기독론적인 의미라고 이해될 수 있겠다.

III.

'믿음'과 관련해 또 다른 특이한 점은 '믿음이 적다'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특별히 제자들에게 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oligopistia 17,20; oligopistos 6,30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5,1의 "제자들이 나온지라" 구절에 근거할 때 이 말의 대상은 제자라고 할 수 있다.]; 8,26; 14,31; 16,8).

마 17,20의 병행구는 막 9,29인데 여기에는 마태복음 처럼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제자들을 책망하는 장면이 없다.

마 8,26의 병행구는 막 4,39와 눅 8,24이다. 이 두 곳에서는 마태와는 달리 먼저 예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각각 "어찌 믿음이 없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신다. 이에 반해 마태에서는 먼저 제자들을 가르켜 '믿음이 적은자'라고 꾸짖으시고 난 후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다.

예수님 처럼 물위를 걷다가 두려워 하여 물에 빠진 베드로를 가르켜 "믿음이 적은 자"라고 예수께서 꾸짖으시는 마 14,31의 장면이 막 6,50 이하에서는 빠져 있다. 요 6,20 이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눅에서는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이야기 자체가 없다.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 이상을 먹이신 기적 후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을 두고 예수께서 "믿음이 적은 자"라고 (마 16,8) 비난하신 구절이 막 8,17에서는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로 표현되고 있으며 눅 12,1 이하에서는 아예 제자들의 몰이해나 이를 꾸짖는 장면 자체가 없다.

따라서 '믿음이 적음'이라는 용어는 마태의 고유한 것이며 특별히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사용된다. 즉 타 복음서에서는 단순히 '믿음이 있음'과 '믿음이 없음'으로 구분하는 데 반해 마태는 그 중간 영역으로 '믿음이 적음'이라는 지대를 설정하고 있다. (예외 눅 12,28. 마 6,30의 병행구 눅 12,28에는 마태와 같은 "믿음이 적은"이라는 [oligopistoi] 표현이 나온다). II.에서 내린 '믿음'의 정의를 여기에 적용한다면 '믿음이 적은' 자들이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만 고백하는 자들 ("나더러 주여 주어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7,21), 실제로는 아직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갖지 못한 자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현실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살지 못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믿음이 적음', '믿음이 적은'과 비슷한 단어군이라 할 수 있는 '믿지 않음', '믿음이 없는'이 (apistia, apistos) 마태복음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 지 살펴보자. '믿지 않음' (apistia)는 마태에서는 13,58에서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유일하게 1회 나오는 데 병행구인 막 6,6에도 같은 단어가 나온다. 마 17,17에서 단 한차례 등장하는 단어 '믿음이 없는' (apistos)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병행구 막 9,19와 눅 9,41에 모두 나온다. 즉 apistia, apistos는 마태의 병행구인 막, 눅에 모두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태복음의 특별한 어휘가 아니며, 사용된 구절에서 보듯이 대상이 제자들이 아니다.

마치면서

마태복음의 '믿음'이란 신뢰, 신실함, 용기,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께 혹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의 (악의) 현실을 새 현실로 바꾸신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악의) 권세를 치시고 그 분께서 권세를 잡으신다는 것을 전적으로 그리고 신실하게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용기를 갖고 과감하게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그러한 현실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의 신앙의 대상은 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마 18,6; 비교 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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