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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유대인을 위한 복음인가?: K.W.Clark (마태-4)

1. 시작하면서

네 번 째 마태복음에 관한 연재로 영미권 학자인 K.W. Clark의 The Gentile Bias in Matthew, JBL 66, 1947 165-172를 번역, 소개한다. 아마 기존 학자들의 마태복음을 이해하는 입장을 소개하는 글로 써는 이 연재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저자문제와 관해서 보자면 지금까지 소개한 R. Hummel이나 U. Luz와는 달리 K.W. Clark는 마태복음이 이방인에 의해 쓰여졌다고 본다. 번역은 문자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체 뜻을 잘 전달하는 데 역점을 두고 했다. 꺽은 괄호 [...] 내의 내용은 이해를 돕기 위한 번역자의 개인적인 첨가물임을 밝혀둔다.

2. 몸글

일반적으로 마태복음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에 의해 쓰여졌다고 알려진다. 이에 관한 근거로 족보, 블럭화된 교훈적인 자료들의 모음, 많은 유대자료 인용, 종말론적인 구절들, 유대적 분파주의, 셈어적인 단어들과 경구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 나라' 대신에 '하늘 나라'를 사용되는 점들이 제시된다. 그래서 이방기독교적인 경향들은 이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면 갑자기 등장하는 처녀잉태 이야기, 기적 강조, 이스라엘이 배척됨 (21,43), 바리새인들과 (23장) 사두개인들에 대한 심판 (16,6) 그리고 대 선교명령 [28,19].

그러나 이와 관련해 이방인출신 기독교인인 누가도 족보를 제시하고 있다던가, 누가와 심지어 이방인인 Epiktet도 마태가 사용한 교훈적인 자료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래전부터 구약에서 나온 증빙자료나 예언에, 그리고 기독교적인 믿음의 종말론적인 배경에 익숙해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의 전반부에 있는 유대적 분파주의는 대 선교명령에 더 잘 나타나 있는 복음서의 본테마에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셈어적인 표현들과 랍비적인 하나님 이름 사용을 피하는 것과 관련해 보자면 이는 세부적인 연구를 통해 반박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종종 반복되는 마태복음의 유대인 저자설은 이성적인 것이라기 보다 전통적인 견해이다.

항상 언급되지만 이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마태복음에 있는 이방기독교적인 경향은 단순히 유대인 저자에 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시리아에 많은 유대인들이 헬라화 되었지만 기원 후 90년 경에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버림받았다는 내용의 복음서를 쓸 수 있는 유대인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유대교로 부터 개종한 이가 지금까지 신봉했던 자신의 종교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한다고 때때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주관적이며 사변적인 판단이다. 바울의 경우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롬 11,1). 그리고 마태복음이 쓰여질 당시 어떤 유대인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기 위해 유대교를 배척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마태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점은 마태를 이방기독교적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다.

마태의 테제는 초기 바울의 복음과 같지 않다. 바울의 선포에 따르면 이방인은 새 이스라엘에 편입될 때 구원될 수 있다. 마태의 복음은 기독교가 -주로 이방기독교적인- 유대교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참 이스라엘로서 나온다는 것이다 (8,12; 12,21; 21,43; 28,19). 이러한 이방기독교적인 입장이 마태의 주테마이다.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은 더 이상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했고 죽였다 (21,39). 이제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심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을 참 이스라엘로 인정하면서, 돌리신다. 이 테마는 마태복음에서 반복된다 (마태의 특별자료에서: 21,28-32; 21,33-43; 22,1-14; 25,1-13; 25,14-30; 25,31-46).

이런 이방기독교적인 경향은 마태기자가 이해하는 율법과 예언의 총체인 제일 큰 계명 [22,36-40] 에서 절정에 이른다. 마태에는 (22,40)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와는 달리 이런 극단적인 결론에 동의하는 서기관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제 진짜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22,41-46). 그리고 유대교의 대표자인 바리새인에 대한 심판이, 또한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이 (그의 자식들은 하나님의 구원권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23,37-39) 나온다. 이어서 성전 멸망에 관한 끔찍한 예언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12,6에서 메시아는 성전보다 큰 자로 선언되고 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언명인 24장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맥락이다. 원래는 유대기독교인에게서 발전되었고 바울과 마가에 의해 일찍이 받아들여진 그러한 묵시적인 표상세계를 이방기독교인들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마태와 마찬가지로 이방기독교적인 누가도 소묵시록를 수용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단락이 어떤 작품에 있다고 해서 이것이 단순히 유대적 사고방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방기독교적인 사고에 의해 마 24가 유래되었으며 (눅 21 과 마찬가지로), 마태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 장은 명백히 이것을 기록한 저자가 이방기독교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음을 (그가 닥아오는 심판를 유대교로 향하게 했다) 알 수 있게 한다. 24,45에서 주인이 오는 것에 대비한 진실된 종은 이방기독교인을 의미한다. 반면 주인이 오는 것를 개념치 않는 나쁜 종은 거역하는 유대교를 묘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슬피 울며 이을 가는 저주받은 외식하는 자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24,51) 이 단어는 [즉 외식하는 자] 마태에서 만 발견되며 분명히 23장을 염두에 두고 언급된다.

마태의 심판과 저주기사는 유대교를 위해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이미 경고가 충분히 내려졌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회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한 유대교가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내 버렸다고 본다. 이 이방기독교적인 서술이 마태의 주테제이며 그러한 기술은 그가 이방기독교 저자라는 입장에서 가능하다.

마태복음의 저자를 세리 마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적어도 이 복음서의 저자는 유대인이라고 보는 가정에서 나오는 것으로 써, 이에 대한 세심한 연구가 필요하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수 많은 구약인용은 이 복음서의 저자가 유대인임을 의미한다고 흔히 말해지고 있다. Westcott와 Hort는 그러한 인용이 123 개 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구약인용이 109 번, 사도행전에 133 번 나온다는 사실은 곧 잘 잊혀지고 있다. 마가나 Q에서 가져오지 않은 구약인용은 마태에 약 40번, 누가에 약 50번 나온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만약 사람들이 누가의 저자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유독 마태복음은 이 사실에 근거해서 유대인이 저자라고 한다면 이는 비논리적이다. 만약 마태가 성취된 예언과 관련해서 성찰하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누가도 그렇고, 이방인 기자에 의해 쓰여진 다른 신약성서들도 그렇다. 기독교의 발전을 위해 구약을 그처럼 사용하는 것은 이방기독교인 혹은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을 막론하고 당시 성서기자들에게 있어 일반적인 관행이였다.

때때로 마태는 70인 역 그리스어 성서 보다 오히려 히브리어 성서를 사용했다고 주장된다. 그러나 분명히 마태는 70인 역 성서를 사용한다. 특별히 마태의 특별자료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는 심지어 마가에서 온 구약인용이 70인 역의 의미로 바뀌어 지고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마태복음에서 70인 역 성서와 차이가 나며, 많은 경우 히브리어 본문과 유사한 인용들을 발견하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구약인용을 모아 놓은 얼마되지 않는 목록을 가지고도 서로 다른 주석가 간에 그것이 원래 히브리어를 대본으로 하는 지, 아닌 지에 대해 의견이 서로 다르다. [어떤 특정한 구약]성서 구절이나 구절들을 마태기자가 염두에 두는 지도 불확실하다. 즉, 마태복음 내에 있는 구약인용이 히브리 텍스트에서 왔는 지 70인 역의 영향 하에 있는지를 정하는 데 있어서 어떤 구절이나 구절들이 기본 대본이 되어야 하는 지도 불확실하다. 더 나가 맛소라 텍스트가 거론되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텍스트의 초기의 형태나 형태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대표적인 결론이 T.H. Robinson (The Gospel of Matthew, Moffatt Commentary, New York 1928, p. XVI)의 주석에 나온다: "우리는 때때로 [마태에 나오는 구약인용에서] 완벽하고 독립적인 히브리어 텍스트를 만난다", 혹은 "우리는 맛소라 텍스트에서 나온 독립적인 번역에, 아니면 일반적인 히브리어 성경과 다른 어떤 히브리어 텍스트에 직면한다." 그러나 그러한 구절들은 분석해 볼 때 이 결론은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설정되고 있는 히브리어 대본은 완전히 가설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독립성은 70인 역-기원설 뿐 아니라 히브리어-기원설 까지도 모호하게 만든다. Robinson은 더 나가 "이 복음서의 저자는 그리스어 대본을 더 사용한다"고 관찰한다. 마찬가지로 B.W. Bacon (Studies in Matthew, New York 1930, p. 477)도 "마태복음서 기자는 70인 역에 종속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결론은 다르게 말해서, 마태복음에서 사용된 구약인용은 어떤 히브리어 성서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없으며 유대인 저자설을 의미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와 관련해서 꼭 다루어야 할 몇 가지 표현이 마태복음에 있다. 마태저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바, 이것이 전통에 [즉 유대적인 전통] 근거한 경외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되어 진다. 마가적인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하늘 나라'로 바꾼 것이 마태의 특징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마가는 유대인 임에도 불구하고 비록 "하나님"을 사용하면서도 경외심을 손상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울도 비록 "하나님 나라"를 종종 사용하였고 늘 "하나님"이란 말을 썼지만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다. 그러므로 "야훼" 대신 대용단어의 사용에서 보여지는 경외심은 초대기독교 시대 당시 유대인이 하나님 이름를 쓰거나 말할 때 손상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마태 역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4 번이나 사용한다. 주석가들은 왜 그가 그랬는 지 특별한 이유을 대곤 한다. 그러나 그가 이 말을 사용했다는 그 사실 자체는 흔히 널리 알려진 이론과 대치된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마태에서 얼마나 사용했는 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아마도 마태가 "하늘나라"라는 말을 선호한 이유는 그가 유대인이여서 경외심 때문에 "하나님"을 사용하길 꺼려서 그랬다고 보는 것보다 "하늘나라"라는 말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거나 혹은 그의 언어습관 때문이였다고 보는 것이 더 낳을 것이다.

특별히 흥미있는 표현으로 23,5의 "경문"을 들 수 있다. G. Fox는 (The Matthean Misrepresentation of Tephillin, Journal of Near Eastern Studies 1, 1942 pp. 373-377) 이에 관해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히브리어 totaphoth가 (출 13,16; 신 6,8; 11,18) 70인 역에서는 오로지 asaleuton [경문, 즉 미간에 붙이는 표]으로만 번역되었으며 시리아 페쉬타와 탈굼에서는 tephillin으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마태복음에서는 (23,5) 그러나 tephillin이 phulakteria로 표현된다. 이러한 이유를 Fox는 마태기자가 바리새인을 이방적인 미신신앙 하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마태에 의하면 그들은 Tephillin에 대한 경외감을 갖기보다는 부적의 주술적인 영향력을 믿는다. A.T. Olmstead도 (Jesus in the Light of History, 1942 p. 182) 주장하기를 예수님 자신도 부적의 의미를 갖고 있는 tephillin이 아닌 다른 단어를 사용했으며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비판하셨다고 한다. 어찌되었거나 전체적으로 볼 때 tephillin이 잘못된 사용이 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데에서 이 비판이 시작된다. 많은 유대인들이 tephillin용례의 심오한 의미를 더 이상 알 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마태가 phulakteria를 한 번만 사용했다는 사실은 어찌 되었건 그가 이방기독교 지역의 저자임을 말해준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또 다른 표현으로 사탄의 이름을 들 수 있다. 단지 셈어적인 단어 satanas [사단] 는 바울과 (8 회) 마가 (5 회)에서 사용된다. 이방기독교인인 누가는 satanas를 5회 (1 회는 마가로부터 가져옴) 그리고 diabolos [마귀]를 5 회 (여기서 누가는 두 번 마가 것을 변형했다) 사용한다. 마태에는 satanas가 4 회 (3 회는 마가에서 가져옴), diabolos는 6 회 (1 회는 마가 것을 변형), poneros [악한 자]는 1 회 (마가 것을 변형함), 그리고 peirajon [시험하는 자]는 1 회 사용한다. 이같은 표현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서로 구별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마가같은 초기의 유대기독교 저술가가 예외없이 셈어적인 단어를 썼다는 사실은 마태도 누가처럼 이방기독교 출신임을 추측케 한다.

마태에 나오는 상이한 여러 셈어 단어를 볼 때 마태저자는 유대인의 모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마가에 나오는 boanerges [보아너게] (3,17)와 taleitha koum [달리다굼] (5,41)를 빼버렸다. korban [고르반] (7,11), bartimaios [바디매오] (10,46), rabbounei [선생님] (10,51) 그리고 심지어 Abba [아바] (14,36) 같은 단어들도 다른 그리스어로 대치시켰다. 2 회에 걸쳐 그는 마가적인 이름형태 Iskarioth [가롯] (막 3,19; 14,10)를 그리스풍으로 바꾸었다. 그는 hosanna [호산나]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했고 (마 21,9) Golgotha [골고다]의 뜻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후자의 경우 번역을 시도한다 (27,33). 마태저자는 '예수'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충분한 언어지식이 [즉, 유대언어에 대한] 없는 어떤 기독교를 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Bacon은 지적한다. 필경 어떤 유대인 저자가 당시 통용되던 아람어에 대해 언어적인 어려움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으나 마가는 명백히 마태보다는 더 낳은 [언어]이해를 보여준다. (마가 자체에도 taleitha koum 5,41; o uios timaiou Bartimaios [디매오의 아들] 10,46; Abba o pater [아바 아버지] 14,36 라는 표현들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엿보인다. 마태는 이들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논증들에 근거해서 마태가 유대인이라는 전통적인 견해가 옳다고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기존의 논증들이 마태복음의 유대인 저자설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음을 밝혔다. 마태에서 보여지는 숫자를 규정하는 형태들에 대한 관심과 (더 자세한 것은 Moffatt과 M.S. Enslin, Christian Biginnings, New York 1938, 390 을 참고) 윤리적인 훈계들에 대한 관심은 마태와 동시대의 이방인들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님도 여기서 부연될 수 있다.

모든 주석가들은 마태에 유대적인 요소와 이방인적인 요소가 잘 통일되어 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들이 '왜 그런지'에 대해 설명을 할 때, 의견이 서로 다르다. E.F. Scott는 마태저자를 유대인이라고 보는데 주저하면서 마태를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Literature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1936, p. 75. 67) "마태복음에 있는 유대적인 색채는 자료와 관련된 것이지 그 복음서 자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 외에도 마태에는 유대기독교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이방기독교적인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것이 많이 있다".

우리는 자료들에 대한 설명을 위해 더 정확한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태는 강하게 어느 한 쪽을 편들고 있다. 그는 이방인을 선호하며 유대인을 비난한다. 그는 이방기독교인이며 이방기독교가 이미 바울 당시 융성했던 시리아에서 복음서를 썼다. 그는 원래 유대인들에게 선포되었던 기독교 복음이 그들에 의해 거부되어 졌다고 믿으며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등을 돌리시고 이방기독교를 택했다고 믿는다. 그의 복음서에서 나오는 두 줄거리는 하나님의 계획 하에 있는 이 두 단계를, 즉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구원한다는, 반영한다. 그러나 이방인이 유대인의 자리에 대신 선다는 확신은 마태복음의 자신의 복음이며 이것이 마태복음의 이방기독교적인 전제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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