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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에 관한 연재를 시작하며 (마태-1)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마태복음에 관한 글을 실어보려 합니다. 그 순서는 (1) 연구사적으로 가치있는 글을 번역, 소개하기, (2) 마태복음에서 한 두 가지 테마를 선정하여 다루어 보기, (3) 그리고 부족하지만 이에 근거해서 마태복음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입장을 도출해 내기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에 앞서 서론 격으로 마태복음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는 대표적인 어려움 몇 가지를 다룹니다.

몸글

마태복음은 통상 유대인을 선교의 대상으로 하며,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잘 이해시키고, 믿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이 복음서에는 여러 가지 유대교적인 요소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예수를 구약예언의 성취에 따라 오신 메시아로 강하게 묘사하려는 경향, 예수의 칭호 중 유대적 색채가 강한 '다위의 자손'이 강조되고 있는 점 등) 이런 점에서 벌써 이 복음서는 그 특성 자체로 어려움을 갖고 있다. - 즉 유대교에서 벗어난 새로운 믿음인 기독교를 다시 유대교적인 색채로 묘사한다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 외에도 전체 신약성서와 비교해 볼 때 마태복음에는 여러 가지 신학적인 난제들이 있다. 그 중 우선 '의'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바울이 이해하는 '의'의 개념은 오직 이것으로 만 구원받는, 그리고 하나님 자신께서 주권적으로, 은총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2),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갈 3,10) 이라고 말함으로 써 '의'의 기준은 율법이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마태는 "누구든지 이를 (즉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5,19 이하) 라고 함으로써 '의'라고 할 때 율법(계명)을 지켜야 됨을 전제하고 있다.

다음의 난해성으로 최후의 심판에 대한 이해를 들 수 있겠다. 바울은 이를 종국적인 죄,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이해한다 (롬 8,18 이하; 고전 15,51 이하; 살전 4,16 이하). 물론 그의 서신 중에 이 심판이 경고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예를 들면 롬 2,5 이하; 고전 3,12 이하; 고후 5,10; 살전 5,1 이하) 이는 권면이라는 전체 문맥 하에서 사용되고 있다. 본격적인 종말론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롬 8, 고전 15, 살전 4) 그 같은 경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이에 비해 마태는 이 개념을 전적으로 경고와 권면의 맥락에서 사용한다. (24-25장, 특별히 24,37 이하; 25,31 이하)

한편 마태복음 내에서도 서로 내용이 상치되는 곳이 있다. 구원의 조건을 그 중 하나로 들 수 있겠다. 5장에 따르면 율법을 지키면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25, 34 이하에 의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40절) 라고 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이 구원의 조건으로 묘사된다.

또 다른 마태복음 내의 대표적인 모순으로 이방선교를 들 수 있다. 10,5 이하나 15,24에 따르면 예수님의 선교 대상이 오로지 이스라엘, 즉 유대인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마지막 장에는 (19절) 그 대상이 '모든 족속'이다. 그리고 8장에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는 장면과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0절) 이어서 유대인들이 구원에서 제외됨을 암시하는 구절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1절; 참고 포도원의 비유 중 21,41), 그리고 선교대상이 유대인임을 분명히 천명하는 부분에서도 (10장, 15장) 바로 이어 오로지 이스라엘로 보냄받은 제자들이 박해를 받고 그들의 복음선포가 이스라엘에서 공명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 (10, 14 이하), 그리고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그의 딸을 고치는 장면 (15,28) 등은 마태복음에서 이방인 선교 문제에 대해 통일된 입장을 찾기 어렵게 한다.

마치면서

위에서 언급한 마태복음 내의 여러 난해성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가 이 연재의 종국의 목적이라 하겠습니다. 실로 이것이 가능할 지는 독자 여러 분들이 이 연재를 비판적으로 지켜보며 종국에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다음 편에는 우선 마태복음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단초를 제공하는 몇 몇 학자들의 글을 연재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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