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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복음/ 1 성령 (요한-4)




I. 복음

1. 성령: 회상(sich erinnern)으로서의 복음의 현재

1.1. 요한복음의 해석학적인 자의식

   요한복음은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주는 계시의 매개로 자신을 설정한다. 이 계시는 독자들에게 시간적인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계시는 독자들에게 관련있는 것으로 유효한 것으로 되기 위해 현재화하여야 한다.
   이 계시의 현재화의 가능성은 복음의 첫 마지막을 끝맺는 약속을 통하여 주어진다: 비록 인간들이 계시자를 [즉, 예수 그리스도] 더 이상 볼 수 없더라도, 인간은 계시자의 동시대인이 될 수 있다 (요 20,29).
   계시의 구체적인 매개로서의 현재화는 요한복음에서 '우리'를 통해 대변되고 있는 한 계시전승의 증언을 통해 (Joh 1,14.16; 3,11; 4,22; 9,4; 21,24) 나타난다. 이 '우리'-그룹은 인간이 된 로고스을 고백하는 그룹으로 그리고 책과 계시전승의 자기설명 속에서 구체화된 계시자의 음성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요 21,24에서 이 '우리'-그룹은 소위 사랑하는 제자의 증언을 언급하면서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 요 13,21-30; 19,25-27; 20,2-10; 21,1-23), 그를 '우리'-그룹은 자신들의 설립자라고 본다.
   구체적인 계시의 수용으로써의 매개는 성령을 통해 가능한 제자들의 '회상'을 통해 일어난다.

1.2. 계시의 현재화로써의 '회상'

   '회상'(sich erinnern 'mimneskesthai' 요 2,17.22; 12,16)과 '기억' (erinnern 'hypomimneskein' 요 14,26)은 제자들의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와의 불일치적인 일치를 나타내는 요한의 해석학의 용어이다.
- '기억'의 대상은 지상의 예수의 역사 (요 12,16)이며 계시자의 말씀들이다 (요 2,17.22; 14,16).
- 이 '회상'의 주체는 제자들이다 (요 2,17.22; 12,16).
-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제자들의 이 '회상'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을 때 (요 2,22), 그리고 그가 영화되어지셨고 [verherrlicht wurde] (요 12,18), 혹은 보혜사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회상시킬 때에야 (요 14,26) 가능하다는 점에서 문제시된다.
   그러므로 요한의 '회상'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의미한다. 지상의 예수의 역사에 관한, 그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의 부활과 그의 영화되어지심과 보혜사의 가르침을 통해 가능케 된다.

요 2,13-25
   이 이야기는 성전청소를 성전의 기능변화의 의미로가 아닌 (예를 들면 막 11,15-18 "성전은 모든 민족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계시로서 서술한다 (내 아버지의 집).
   이 계시는 표적을 요구하는 요대인과의 논쟁을 도발시킨다.
   표적은 세 차원으로 이해되어진다.

- 유대인들은 성전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원래적인 의미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 "이 성전"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한다. 요한의 묘사는 성전의 멸망이 예언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의 요소를 갖고 있다: 멸망의 선언이 아닌, 단지 성전의 재건의 약속이 장애를 일으킨다.
- 화자는 독자에게 전의적인 의미로서의 "이 성전"을 가르키면서 두 번째 해석을 제공한다: "이 성전"의 멸망과 재건은 막 14,58에서 처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 화자의 언명과 대화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선언 속에 있지 않다: 이 선언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주장을 지적하는 한 표적이다.
-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감을 전제로 하는 하나의 '기억 (Erinnerung)'을 통해 비로서 가능하다: 예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는 육이 되셨다가 원래 하늘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 하나님의 로고스이다.
   이 언명은 요 4,19-24의 동의어이다: 참된, 종말론적인 유월절은 하나님의 양의 들리우심이다 (요 2,13 cf. 요 2,23; 6,4; 11,55; 12,1; 13,1; 18,28.39; 19,14). 참된 성전은 예수이며 (요 2,21) 성령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이다 (요 4,23).

요 12,12-19
   시 118,25-26과 '이스라엘 왕에 대한 환호'를 이용하여 요한은 성전입성을 하나님에 의해 보내지신 이의 그리고 메시아의 등장으로 묘사한다. 공관복음에도 반복되고 있는 (막 11,1-11) 이 설명은 사 40,9와 슥 9,9의 인용으로 문제시된다:

- 메시아적인 인용은 예루살렘 입성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확증한다.
- 제자들의 몰이해는 (Unverständnis) 그들의 잘못이해하는 성격을 (mißverständlichen Charakter) 나타낸다.
- 예수의 영화받으심에 (Verherrlichung) 대한 지시는 처음으로 올바른 이해을 가능케 한다. doxasthai는 요한 기독론과 신학의 전문용어이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을 아버지께로 올라가심으로 보며,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중 계시로 해석된다 (요 7,39; 8,54; 11,4; 12,16.23.28; 13,31.32; 14,13; 15,8; 16,14; 17,1.4.5.10. cf. 21,19).
   '기억'이라는 동기는, 그것은 예수의 '영화받으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처음으로 열려지는 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첫 올바른 해석은 (즉, 요한적인 해석), 다시 말하면 요한적인 그리고 올바른, 즉 내려오셨다가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상의 예수에 관한 이해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취된 메시아적인 구절들에 대한 사실에 부합하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지상의 예수의 역사는 유대인이나 제자나 간에 그것을 이차원적으로, 즉 세계 내적인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예수의 승귀를 자신의 신적인 유래와 신적인 정체성의 계시로 해석해 주고있는 (요 8,28) 예수의 영화받으심은 그것이 예수님을 하늘의 구원자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이해를 제거한다.
   이러한 전체 맥락에서 '기억'은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를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이야기로 그리고 종말론적인 구원자께서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신 이야기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재발견의 과정이다.
   요약: 기억은 계시자의 말씀의 현재화이고 믿음의 가능성의 선물이다:
- 왜냐하면 '기억'은 시간적인 거리을 이어주며,
- 왜냐하면 '기억'은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과의 종말론적인 거리를 계시해 주기 때문이다.

요 14,25-26
   '기억'을 통하여 매개되는 구원자의 말씀과의 동시성의 가능성은 증언자나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주어진다:

- 영은 다른 보혜사이다 (요 14,16). 성령과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통해 병행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제자들의 보혜사에 대한 관계는 그들의 구원자에 대한 관계와 같다.
- 성령은 아들에게 처럼 병행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제자들에게 보내진다.
   영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 그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친다.
- 이 성령의 가르침은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했던 것을 모두 생각나게하는 것에 있다.
   보혜사의 활동은 제자들에게 구원자의 말씀과의 동시성과 믿음과 영생을 매개시켜주는 데에 있다.

   요약: '기억'은 아버지가 보내신 성령의 선물이라는 점에세 계시자의 말씀의 현재화이며 믿음의 가능성이다.

(I.복음/ 1.성령 [요한-4] 2000.05.2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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