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인간/사회 vs 치유자 예수님

 

 

벤처 기업가로서 촉망 받는 최고경영자(CEO) 얼마 신문의 칼럼을 통해 우리 사회는 조직적인 정신병을 앓고 있는 듯하다고 진단하며, 병을 속히 치유해야 한다고 따끔하게 질책을 했다. 그가 지적한 가지 병폐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서구보다 심한 물질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막상 돈에 대해서는 떳떳하지 못한다. (2) 생각과 행동이 다르다. (3) 유교적인 가치관을 내세우지만 세계에서 () 사기 가장 쉬운 나라이다. (4)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 서로 다른 의견을 중재할 있는 리더쉽이 부재하다. 사업가의 지적을 빌릴 것도 없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은 중증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보인다.

                   유명한 재벌가의 후계자를 자살로 까지 몰고 사안인 '남북 경제 협력' 놓고, 한쪽에서는 "계속 해야 한다", 다른 쪽에서는 "북한이 개발을 강행하고 있는 마당인데 재고해야 한다" 팽팽히 맞서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8.15 광복절에 보수와 진보측이 따로 행사를 가졌다. 새만금 사업 문제도 그렇다. 국민의 세금 1 원을 들여 방파제 조성 작업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 시점에, 시민단체 측이 승소함으로서 법원은 물막이 댐공사 일시 중시 명령을 내렸다.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농림부 장관이 사퇴하여 새만금 문제는 새롭게 쟁점화 되었다. "계속 해야 된다" 전라북도 측의 개발논리와 환경단체나 시민단체 그리고 어민들의 "조성된 토지는 수질오염으로 인해 원래 목적인 농지로 사용이 불가하다, 갯벌이 황폐화된다" 등을 이유로 "해서는 않된다" 의견이 첨예하게 맞서있다. 폐기물 저장소로 변산반도 앞바다에 위치한 위도가 선정되는 과정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한전 실무자들이 현금보상 운운하며 위도 주민들을 설득하여 문제가 되었다. 부안 군수는 유치신청 직전 까지도 절대 우리 군에는 시설을 유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가, 갑자기 말을 바꾸어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에 어업과 관광, 숙박업에 종사하는 부안군 군민들이 생계를 염려하며, 이러한 민선 군수의 조삼모사와도 같은 행태에 분노하여 시위를 벌이고 있다. 노동귀족이라는 비양거림과 함께 강성노조는 우리 경제발전에 방해만 된다는 재계측의 논리와 파이를 키웠으니 이제는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노동계의 입장 또한 팽팽히 맞서있다. 교육계에서는 전교조와 비전교조 간의 대립이 있으며, 외에도 인터넷 세대(2030) 활자 매체 세대(5060) 구별되는 세대 간의 시각차이도 매우 심각하다. 이대로라면 2047년에 재정이 고갈되는 국민연금에 대해 정부가 개정안을 제시했는데, 이에 대해 노동계와 재계가 난색을 표하고 있다. 연금이나 의료보험을 놓고 유리 지갑인 직장인과 소득자료 파악율이 34% 밖에 되지 않는 자영업 종사자들간의 불만이나 반목도 심각하다. 외에도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논할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특별히 선거 마다) 지방색 문제도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한국은 지금 사안을 놓고 해당 당사자들은 심각한 대립과 갈등 속에 빠져있으며, 이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상생의 방향으로 물꼬를 트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 이를 맡아서 처리해야 위정자들은 인기관리나 책임 회피, 그리고 자리 보존에만 급급해 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높은 인건비와 비싼 임대료, 엄격해져가는 환경 규제 등을 이유로 제조업이 점차 외국으로 이전해 나가고 있는 추세이며, 따라서 분야의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이제는 한국의 경제 발전이 성숙화된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고도의 성장은 없을 것이며 따라서 일자리 창출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청년 실업자가 37 5천명이다. 중장년 이후의 실업도 문제이지만, 청년 실업은 특히 한국의 앞날을 책임져야 차세대들이 사회에 발을 내딛기가 힘들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청년 실업율이 높은 사회는 마디로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있다. 현재 우리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1.17명이다. 젊은 세대들이 아이를 안낳는다고 야단법석인 이웃 일본 만해도 1.4명으로 우리 보다 높다. 이러한 저출산율 기록은 불과 30 만에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또한 이혼율이 지난 10 사이 3배로 증가하여 하루 평균 398쌍이 갈라서고 있다고 한다. 통계당국의 비교에 따르면 수치는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높은 것이다. 그리고 노령화가 세계 어느 국가 보다도 가장 빨리 진행되고 있다. 한국은 2019년에 가면 65 인구가 전체의 14.4% 이르러 고령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여기에 소요된 햇수는 단지 19년으로 프랑스 115, 스웨덴 85, 일본 24년과 비교할 유례없이 빠른 속도이다. 이처럼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가 심각하고, 아이를 적게 낳고,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사회의 활력과 역동성이 저하되고 있으며 이혼이 다반사로 이루어 지고 있는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라고 있을까?

언론 매체에서는 지금의 경기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저소득층 사람들이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아이들과 함께) 자살했다는 소식이 종종 신문이나 TV 보도된다. 현재 335 명이 신용 불량자로 등록되어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하는 성인 중에서 일곱 사람 꼴로 경제적인 사형 선고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개인 워크 아웃 제도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 중에서 얼마가 과연 재기에 성공을 있을지 의문이다. 이들 외에도 우리 사회에는 극빈자나 저소득층이 존재한다. 우리의 이웃임이 분명한 이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위엄이라도 유지하고 있도록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배려하는지, 가난이라는 질고에서 벗어 있도록 사회 복지 차원에서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돕고 있는지 반문해봐야 한다. 저소득층에서 빈곤의 대물림 현상이 고착화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면 사회는 건강한 상태라고 있다.

경제에 대한 관심이 요즘처럼 높은 적이 없다.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거의 모든 사람이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돈에 대해 밝히고 있다. 대략 40 이상의 성인들이 어릴 적에 금전과 관련해 받은 교육이라고는 고작 "돈은 더러운 것이니 있는 대로 멀리하라"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얼마 전까지 베스트 셀러 목록에서 계속 1위를 차지했던 책이 '부자 아빠' 시리즈였고, 요즈음 팔리는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의 부자들"이다. 사회 체제 속에서 인간답게, 제대로 살자면 물론 금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이구동성으로 "", "", "" 하는 지금의 우리 사회는 분명 도가 지나친 상태라고 단언할 있다. 우리는 과거보다 모든 측면에서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60 대에는 TV 냉장고 전화가 그리 흔치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들은 물론이요 핸드폰, 컴퓨터, 세탁기, 에어컨 그리고 자동차까지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대다수는 상대적으로 그때보다 불만족한 상태, 무엇인가 더욱 결핍되어 있는 것처럼 느끼며, 물질에 대한 상시적이고, 끝없는 갈증 상태 속에 빠져 있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 현란하게 쏟아져 나오는 광고나 현대 사회의 기본 모드인 경쟁의식을 통해 우리의 소유욕과 소비하고자 하는 마음은 무한대로 팽창되어 있는데 반해, 소득은 이를 따라가지 못해 허기를 느끼는 상태가 바로 오늘 한국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의 속내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황된 대박을 꿈꾸며 카지노나 로또에 탐닉하거나, 경정, 경마, 경륜장을 방황하기도 한다. 누가 과연 이들을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건강한 상태라고 있을까? 기독교인 중에서 과연 사람이나 자기 자신은 이같은 소비지향적이고, 물질만능을 예찬하는 물신주의사상, 배금주의풍조로부터 자유롭다고 단언할 있을까?

 

(성경 이야기 -1)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는 기사가 나온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많다는 의미로 "군대(레기온)"라고 고백한다. "군대" 육천 명으로 구성된 로마군 1 군단(레기온) 일컫는 말이다. 육천이라는 숫자를 통해 있듯이, 사람은 많은 귀신들에 의해 사로잡혀 몹시 고통을 받았으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여기서 "그의 병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귀신들렸건, 혹은 현대 의학용어를 빌리면 정신 분열증이든 간에) 부차적인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소리지르며 돌로 몸을 상하고 있었다" 묘사를 통해 보듯이, 병세가 심각한 중증이였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겪고 있는 곤궁을 간과하지 않으셨다 (이미 귀신에게 나오라 명하심, 이름을 물으심 8-9). 불쌍히 여긴 예수는 그를 고쳐 주시고 온전한 사람으로서 원래 있던 곳으로 가서, 거기서 주님을 증거하며 살기를 명하셨다 (19).

(성경 이야기 -2) 누가복음 19장에는 세리장 삭개오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당시 로마는 세금을 직접 징수하지 않고 대리인을 통해서 걷었다. 일정한 금액을 받고 지역에서 세금을 걷을 권리를 특정인에게 위임한다. 그러면 권리를 사람은 해당 지역에서 능력껏 세금을 걷어, 이미 지불한 권리금을 제한 차액을 자신의 이익으로 취하는 식이였다. 세리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 악랄하게 세금을 징수해 갔으므로, 이스라엘인들은 로마의 주구인 세리들을 가장 경원시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 드렸던 기도 중에는 "오늘 세리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 내용이 있을 정도였다. 동족 유대인들이 자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아는 세리들은, 더욱 인정사정 없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세금을 거두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들의 마음은 비인간화되어 황폐해져 갔으며,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죄의식과 자괴감 그리고 심한 소외감 속에 밖에 없었다. 작은 삭개오도 예외는 아니였을 것이다. 세리장이 어느 말로만 들리던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많은 이적을 행하며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가르친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던 터이라,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 뵙기로 결심하고 나무에 올랐다. 그런 삭개오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죄인이라는 주위의 수근거림에도 괘념치 않으시고 "내려오라, 오늘 집에서 유하겠다" 말씀하신다. 그같은 예수님의 태도에 삭개오는 죄를 뉘우쳤고 (8), 이에 대해 예수님은 구원을 선포하신다 (9).

 

교리로부터 해방된 인간 예수의 원래 모습을 찾겠다는 기치 아래, 19세기 ,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는 예수의 신성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문제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라는 질문은 복음서를 읽을 염두에 두어야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최근의 연구 결과, 역사적 예수의 여러 면이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를 영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자로, 혹은 유대주의를 다시 활성화 시키려고 했던 사람으로, 또는 예언자나, 지혜자로, 그리고 신랄한 언변과 통렬한 비유로 기존의 유대체제를 비판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룩하려 했던 사람 등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외에도 예수는 귀신을 축출하며, 병을 고쳐주신 분으로, 건강하지 못한 인간을 치유하신 치유자라는 관점도 부각되고 있다. 앞의 번째 성경 이야기가 속해 있는 마가복음에 보면 특히 처음부터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가버나움 회당의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침,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침, 문둥병자 고침 - 1; 중풍병자 고침 - 2; 회당의 손마른 사람 고침 - 3; 혈우병 앓던 여인을 고침 - 5). 마가는 이러한 이적과 치유의 능력이 예수의 메시아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병들고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을 다시 온전하고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주된 동인(動因)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한없는 연민과 애정 그리고 사랑은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그분은 외딴 곳에까지 와서 자신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겨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다 ( 6:34).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 소리에 응답하여 그들을 고쳐주신다 ( 9:27). 이러한 마음은 탕자의 비유에서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 ( 15:20) 아버지의 사랑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셨다: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친속에게 고하라( 5:19)".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귀신 들린 , 병든 자는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치유되는 것이다.

삭개오의 이야기 , 예수님의 태도에는 남다른 점이 엿보인다. 보통 사람들이 혐오하고, 접촉하기를 꺼려했던 세리 삭개오에게 " 집에 오늘 유하겠다"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로마를 뒤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는 세리 삭개오의 외적 모습이 아니라 내면 상태를 보신 것이다. 그의 안에 숨겨져 있는 그의 깨어지고 상한 심령을 직시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고, 결과 삭개오가 회개할 있는, 그의 병든 마음이 치유될 기회를 허락해 주셨다. 경우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차별적인 것이 아니다. 분은 "의인을 부르러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 2:17; 9:13; 5:32) 오셨다. 그는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고루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는 ( 5:45)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대로 ( 42:3),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분은 인간의 외적인 모습을 보지 않으신다. 그는 가난하던 부하던, 심지어 로마의 앞잡이라 할지라도 차별을 두지 않으시고, 개인의 병이나, 내면의 상처를 보시고, 측은해 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아픈 곳을 싸매주시고 고쳐주신다. 이러한 일련의 치유와 용서를 통해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해 지고, 정상적인 인간이 된다. 죄를 뉘우치고 행실에서 벗어나,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에 힘입어 다시 건강해진 인간은 거듭난 새로운 존재이다 ( 3). 자신을 가엾이 여기고 불쌍히 여기신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사랑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자긍심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웃도 귀한 사랑의 대상임을 깨닫게 된다.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따라 ( 12:31)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형상을 지닌 존재임을 인정하며 귀하게 여긴다. 그는 이상 구습을 좇아 살지 않는다 ( 4:22). ,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누구든지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역설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 8:35). 귀신들린 자도 예수로부터 치유를 받은 , 마찬가지로 갈릴리 호숫가와 요단 동편의 헬라 도시들로 이루어진 데가볼리 지역에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하였다. 그는 음란하고 많은 세대요 ( 8:38)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질책하신 ( 9:19) 세대를 본받지 않고 ( 12:2),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 13:14)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 의해 치유된 자는 세상의 논리인 자기 중심적 사고, 능력 우선주의, 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통해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무엇이나 있는 자유인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스스로 남을 섬기는 종이 된다 (루터). 섬김을 받으러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를 받아 ( 10:45) 남을 섬기는 삶을 산다 ( 20:26). 영광이 아니라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런 삶을 산다 ( 8:34). 세상과 비동시대적으로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으로 산다 (키에르케고르).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육체적/ 정신적 병이 치유되며 심신이 건강한 상태로 회복된 나를 발견하며, 이를 바탕으로 주위 사람들을 이웃으로 만날 , 우리는 비로서 진정한 의미의 인간(人間) 된다. 이제는 이상 '' 중심적인 사고가 아니라 개방된 태도로, 이웃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산다. 이러한 자세야말로 맘몬주의와 개인/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공공의 이익이나 안녕을 무시하는 편협하고 근시안적인 삶의 풍조가 만연된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자세를 기독교인들이 가질 , 이방인과 과부와 고아를 생각하라고 했던 구약의 말씀이 오늘날에도 실현되어, 우리 사회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웃까지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며, 그들이 가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와 위엄 만이라도 보호하고 존중하는 그런 건강한 사회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