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 3:10(6-14) 대한 고찰

 

들어가는

 

             3:10 바울의 율법이해에서 중요한 구절로서 많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어왔다[1]. 10절을 근거로 일군의 연구자들은 "율법은 지킬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울은 가졌다" 주장하기도 하고[2] 어떤 이들은 이에 반대한다[3]. 이처럼 3:10 논란이 되고 있는,  그래서 주석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구절이다. 일찌기 루터는 3:10 주석에서 바울은 [상반절에서] "율법의 행위를 하는 자는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고 모세는 [하반절에서]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하는데 언명이 어떻게 조화될 있는지 반문하였다[4]. 루터의 지적처럼 10절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서로 모순되어 보인다. 글은 이같은 논리적인 모순문제와, 10절을 놓고 벌이는 "율법은 인간이 지킬 없는 것으로 바울은 보았다" 주장에 대한 찬반 양론을 염두에 두면서, "과연 바울은 3:10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 " 규명하는 데에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3:10 포함된 단락이 (3:6-14)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아 본다. 다음으로 절에서 핵심이 되는 용어 '율법의 행위' '저주' 대해 알아 , 본문 3:10 주석한다. 그리고 10절은 논리전개 단락 3:6-14절과 어떤 연관 속에 있는 지를 알아 본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관찰된 사항들을 근거로 바울은 과연 3:10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 지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몸말

 

I. 3:10 문맥상의 위치

 

             고대 수사학과 편지양식을 갈라디아서에 적용해서 주석한 H.D. Betz 따르면[5] 우리가 다룰 본문은 3,1부터 시작되며, 6 개로 이루어진 Probatio(증명) 중의 (3:1-4:31) 부분에 속한다 (3:6-14)[6]. 수사학에 따르면 Probatio 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목적은 조직적인 증명단계를 거쳐 주장하는 바를 더욱 설득력있게 만드는 데에 있다[7].

             바울은 때문에 갈라디아 지역에 머물게 것을 계기로 (4:13) 곳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갈라디아인들은 "다른 복음" (1:6) 전하는 자들에 의해 "할례를 받고 (5:2f; 6:13) 율법이 요구하는 형태의 삶을 살라" 유혹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바울은 3:1부터 시작되는 Probatio부분에서 이미 2:16에서 제시된 "율법의 행위 vs 믿음" 대비를 갈리디아인들이 신앙을 수용했던 초기의 종교적인 경험과 연결시키고 (3:1-5), "율법과 믿음" 대립을 구약의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조명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닌 믿음임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믿음과 하나님의 '의롭다 인정하심' 의해 확보된 '자유' 현실 속에 (5:1) 계속 머물러 있기를 촉구하고 있다.

 

II. 본문 분석

 

A. 율법의 행위

 

          '율법의 행위'는 복수명사 e;rga속격의 no,mou 이루어진 용어인데, 단어가 함께 사용되는 경우는 신약에서 8 밖에 없으며 모두 바울 서신에 한정되고 있다[8]. 그 중에서 롬 3,28을 제외 하고는 (cwri.j e;rgwn no,mou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표준새번역]) 모두 evx e;rgwn no,mou("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사역])라는 형태로 사용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 3:20; 2:16 3; 3:2,5,10). 갈라디아서에서 보면 evx e;rgwn no,mouevk (dia.) pi,stewj Cristou/ ( 2:16) evx avkoh/j pi,stewj (3:2,5)[9] 서로 대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evx e;rgwn no,mou 구원과 관련된 가지 서로 상반된 입장 중의 하나로서[10], 일부 갈라디아인들은 이를 통해 의로워 지며 (2:16) 영과 능력을 받을 있다고 잘못 오해하고 있었다 (3:5). 이에 대해 바울은 10a절에서 evx e;rgwn no,mou 잘못된 길임을 지적하고 있다. 용어 evx e;rgwn no,mou 이처럼 신약에서 바울 서신에서만 나오고 있고 바울 이전에는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11] 바울 자신의 전문술어라고 하겠다.

             단어군 '행위(e;rga, evrga,jesqai)' 구약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 2:2,3) 인간에 대한 구원행위 ( 43:2; 33:29 LXX) 또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또는 회막, 성전과 관련된 일을 표현할 ( 35:21; 3:7; 3:31; 7:5; 13:10) 그리고 인간이 땅에서 해야 , 하나님으로 부터 위탁받은 임무 등의 ( 2:15)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특별히 헬라지역의 유대인들 사이에는) 인간이 지상에서 일을 해야 했던 이유로 에덴동산에서의 타락을 들면서, 세상에서의 노역을 저주로 여기고 ( 3:17 맛소라 본문 ^r,Wb[]B; [" 때문에"] 70인역은 evn toi/j e;rgoij sou ["너의 안에서"] 바꾸고 있다) 인간의 모든 일을 죄로 생각하는 경향이 유포되어 있었다. '행위' 대한 이같은 부정적인 견해는 신약에서도 흔적을 발견할 있다 ( 13:12; 5:19; 바나바서 4:10; 15; 벧후 2:8; 6:1)[12]. 그렇다면 바울이 '율법의 행위'라고 어떤 의미로 사용했을까?[13].

             용어 '율법의 행위' , no,mou 속격의 형태로 e;rga 연결되어 있다. 속격이 어떤 종류의 속격인 지를 밝힘으로써 '행위' 뜻이 무엇인지를 해명해 있겠다. 우선, 속격을 대상의 속격으로 보고 (objective genitive) "[인간이] 율법을 행한다"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바울은 ('율법의 행위' 부정적이였으므로) 율법을 행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 된다. 하지만 당시 유대교는 율법을 행하는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계명을 행하고 완성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거룩한 이였고[14] 그들은 계명을 준수할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15] 바울도 자신의 편지에서 율법의 완성을 말하고 있다 ( 5:14a; 6:2; 8:4; 13:8-10). 따라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고 해서, "율법을 행하는 " 까지를 부정했다고 보아서는 않될 것이다. 그러므로 속격을 대상의 속격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16]. 또한 율법이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체의 속격도 (subjective gen.) 없다. 그리고 '행위' '율법'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의 속격이라고도 (possessive gen.) 수도 없다[17] '율법은' 성질이 ( 도덕적이냐 아니냐, 경건한가 아닌가 등의) 아니기 때문에[18] 성질의 속격이라고 (qualitative gen.) 여기기도 힘들다. 이처럼 속격에 대한 여러 가지 숙고를 통해 '행위' 의미하는 바를 밝히고자 하는 시도는[19] 유감스럽게도 연구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행위" 무슨 의미인지를 알기 위해 일찌기 E. Lohmeyer 70인역과 주변의 문헌에서 e;rga 나오는 곳을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을 위한 규정에서 흔히 등장하는 용어 e;rga th/j skhnh/j 혹은 th/j leitourgi,aj 혹은 th/j qusi,aj ( 35:21; 3:7; 4:47; 7:5; 8:15; 대상 9:19,31; 23:24,28) 에서 e;rga 차례 행해진 것일 아니라, 항상 새롭게 행해져야 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e;rga 그러므로 개인이 자신의 행동을 통해 다해야 과제이자, 과제를 수행하는 행동이다. 그런 맥락에서 e;rga "행한다" 동사로 (poiei/n, evrga,jesqai) 서술되고 있으며 ( 3:7; 8,26 )[20] 하나님의 e;rga 행한다는 구절에서 ( 36:1.3; 3:7,8,26,31; 4:23,30,43; 8:19,26; 대하 29:35 ) e;rga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로서, "계명"이나 "규칙" 의미한다[21].

             이처럼 e;rga '계명'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최근 쿰란문서 중의 하나인 4QMMT 연구를 통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J.D.G. Dunn (4QMMT, 1997) 이어 M. Bachmann 자신의 논문에서 e;rga no,mou 상응하는 히브리어 표현인 hrwth yf[m 유일하게 등장하는 문서 4QMMT 조사하였다[22]. 결과 C 27 hrwth yf[m tcqm ("some of the precepts of the Torah"[23]) 공동으로 사용된 단어 tcqm 전거들의 분포로 , B 1 wnyrbd tcqm ("some of our rulings"[24]) 의미가 비슷한 것인데, 후자는 (B 1) 주로 성전의 제사, 정결과 관련된 일련의 법령들이 다루어지고 있는 B 부분의 제목에 해당하며[25], 따라서 hrwth yf[m "율법의 규정들(Regelung)" 의미한다고 M. Bachmann 보았다[26]. 이와 유사한 예로 18:20 있다. 여기서 hX[mh[27] "율법" 뜻으로, "the law that they must perform"으로 번역된다[28]. 이같은 예들은 E. Qimron 지적처럼, 2 성전시기 이후 단어 myX[m "율법"이나 "계명"들로 이해되었음을 의미한다[29].

             이상의 연구결과를 고려해 바울의 용어 e;rga no,mou에서 특별히 e;rga '율법의 관련 조항들을 행한다' 의미보다는 '율법의 규정들, 법령들'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것이다[30]. , 바울이 e;rga no,mou 반대할 뜻하는 바는 이미 낡은 파라다임이 '율법' 대한 거부이지, '율법을 행하는 '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용어를 근거로 "바울은 율법을 행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주장해서는 않된다 하겠다. 이러한 '율법의 행위' 대한 이해는 3:10 뿐만 아니라 다른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도 (예를 들면, 2:15 "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31], 또는 3:27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32]) 많은 도움을 준다[33].

 

B. 저주

 

             '저주' '축복' 함께 종교의 역사를 통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정한 종교적인 행위로서, 초자연적인 작용-인과관계의 힘을 빌어 대상자에게 해가 미치도록 하는 주술적인 언어행위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인들은 말을 통해 선언되어진 것은 현실에서 효력을 가지며, 특별히 제사장이나 주술가 혹은 지파의 지도자 등이 선언한 저주는 더욱 힘을 발휘한다고 믿었다[34]. 22 이하에는 모압왕 발락이 발람을 데려다가 쳐들어오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저주를 해달고 부탁하는 (22:6)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저주나 축복의 선언이 현실에서 영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었음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따라서 하나님이나, 그의 대리자에 의한 혹은 성서에 근거한 저주선언은 대상자에게는 바로 심판의 행위로 인식되었다.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있는 자들' 대해 바울이 했던 "그런 자들은 저주 하에 있다" 질타는 따라서 말이 아닌 역동성이 있는 선언이다. '저주' kata,ra라는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단어를 이곳 3:10a 13절에서만 쓰고 있다. 3:10b,13b에서는 유사한 뜻으로 형용사 evpikata,ratoj 등장한다[35]. 외에서 단어 kata,ra 6:8, 2:10 그리고 벧후 2:14에서 나온다. 3:10 6:7f에서 보듯이 '저주'라는 단어는 많은 경우에 '축복 (euvlogi,a)'이라는 단어와 댓구를 이루면서 (혹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는 70인역 성경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27:12 (참고 29 evpikata,ratoj vs euvloghme,noj); 23:25 (참고 22:6,16); 11:26,29; 23:6; 30:1,19; 9:2; 13:2; 108:17; 3:33 (euvlogou/ntai); 65:23 (huvloghme,non); 8:13; 2:2.

             구약에서 보면 "율법을 범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다" 표현이나 9:11 (LXX),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계명과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있다" 말이나 ( 28:15,45 LXX), "언약의 말을 쫒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 11:3 LXX),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 다른 신을 쫒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 11:28 LXX) 등의 내용은 있지만[36],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있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 말은 없다[37]. 따라서 3:10a 발언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13절에서도 '저주' 등장하는데 여기서 '저주' 율법과 직접 관련이 저주이다: "율법의 저주로 부터 그리스도가 '우리' 속량했다". 디다케의 마지막 부분에 (Did 16:5) 보면, 비록 같은 단어(kata,ra) 아니지만 kata,qema ("저주")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멸망하지만 신앙 가운데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은 저주 자체로 부터 구원될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나면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주님이 거룩한 자들과 함께 오신다고 하면서 (6-8) 디다케는 끝을 맺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 예루살렘성에 대한 묘사에서도 단어 kata,qema[38] 나온다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예를 통해서 있듯이 저주로 부터 해방은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3:13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사건을 인간들을 '저주'에서 해방시킨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있다. 여기서 저주는 보편적이고[39]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총체적인 진노 (ovrgh, 1:18; 살전 5:9) 또는 정죄와 (kata,krima 5:18; 8:1) 관련이 되어있다고 하겠다[40].

 

C. 3:10

 

             소고를 통해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10절은 '계속' 의미하는 접속사 ga,r ("따라서", "그리고")[41] 시작한다. 3:10a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42] 있는 자는[43] 저주 하에 있다" ( [Osoi evx e;rgwn no,mou eivsi,n u`po. kata,ran eivsi,n) 말한다. 종래의 견해에 따르면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있는 ' ( [Osoi[44] evx[45] e;rgwn no,mou) "그의 입장이나 특성이 법규를 율법주의적으로 준수하는 행위로 부터 유래되는 사람"[46], 또는 "그의 특성이 율법의 행위 위에 정초된 "[47], 혹은 "자신의 구원을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48], 그리고 "자신의 실존 원칙을 계명준수에 두는 " 등을 의미한다[49]. 그러나 앞에서 살핀 e;rga 대한 새로운 이해에 따르면 "토라의 계명들에 근거하는 "라고 있겠고[50], "토라의 계명"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있다: 바울 대적자들이 전한 잘못된 복음에 (특별히 할례를 강조하는) 빠져들면서도 갈라디아인들은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51]. 그러므로 바울은 5:3에서 "내가 할례를 받는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라고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e;rga no,mou 말할 , 이는 율법 중에서 주로 할례 (5:2ff; 6:12f), 유대의 종교적 절기 (4:10) 그리고 정결법 (2:11ff) 특정한 계명들을 염두에 것이다[52].

          이런 자들이 저주 하에 있는지에 (u`po. kata,ran) 대한 이유를 바울은 10b "기록된바" (ge,graptai ga.r o[ti) 시작되는 구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개역)". 10b절은 27:26 인용한 것이다. 구약 원문과 그것의 그리스어 역인 70인역 그리고 바울의 인용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t'Aa tAf[]l; taZOh;-hr'ATh; yreb.DI-ta, ~yqiy"-al{ rv,a] rWra' "그것들을 행하라는 율법의 말씀들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역]" ( 27:26a)

 

evpikata,ratoj pa/j a;nqrwpoj o]j ouvk evmmenei/ evn pa/sin toi/j lo,goij tou/ no,mou tou,tou tou/ poih/sai auvtou,j "그것들을 행하라는 율법의 모든 말씀들 안에 머물지 않는 모든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역]" ( 27:26a LXX)

 

evpikata,ratoj pa/j o]j ouvk evmme,nei pa/sin toi/j gegramme,noij evn tw/| bibli,w| tou/ no,mou tou/ poih/sai auvta, [사역]" 그것들을 행하라는 율법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에 머물지 않는 모든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 3:10b)

 

             위의 문장들을 각각 비교해 보면 크게 세가지가 눈에 띄인다: 1. 우선 마소라 텍스트의 관계불변사 rv,a] 70인역에서는 pa/j a;nqrwpoj o]j 번역되어 구약 원문에는 없는 pa/j a;nqrwpoj 추가되어 있음을 있다. a;nqrwpoj 세겜의 12계명이 시작하는 맛소라 본문 15 처음이 rv,a] vyaih' rWra'임을 감안할 (70 역은 evpikata,ratoj a;nqrwpoj o[stij),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서, 절과 동일한 형태를 이루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있겠다. 바울은 a;nqrwpoj 생략하고 pa/j o]j라고 하였다. 하지만 단어 a;nqrwpoj 유무에 상관없이 전체 뜻은 차이가 없다. 70인역이나 바울에는 공통적으로 pa/j가 있는데, pa/j 누구나 예외없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의미로서 강조의 뜻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2. 원문 taZOh;-hr'ATh; yreb.DI-ta 70인역은 evn pa/sin toi/j lo,goij tou/ no,mou tou,tou으로, 바울은   pa/sin toi/j gegramme,noij evn tw/| bibli,w| tou/ no,mou으로 번역했다. 우리는 여기서 70인역이 보다 더 원문에 충실함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70인역도 바울처럼 원래 없는 pa/sin[53]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맛소라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데 반해, 바울은 lo,goij tou/ no,mou tou,toutoi/j gegramme,noij evn tw/| bibli,w| tou/ no,mou라고 바꾸었다. , 지시 대명사를 생략했고 (taZOh;, tou,tou) "율법의 말씀들" "율법의 책에 기록된 것들" 바꾸었다. 3. 끝으로 사소한 것이지만 맛소라 텍스트의 ~t'Aa ("남성, 3인칭, 복수, 목적격) 70인역은 남성 대격 복수 인칭대명사 auvtou,j, 바울은 중성 대격으로 (auvta,)[54] 번역하고 있다.

             3:10b 사본에 따라 evmme,nei 다음에 전치사 evn 추가되어 있기도 하다 (a2 A C D F G ÷ latt). 합성동사 evmme,nein 다음에는 곧잘 여격이 나온다. 또한 전치사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 14:22에서는 evn 없이, 8:9에서는 evn 함께). 보통 여격과 쓰일 때는 광의의 뜻으로, 전치사와 함께 쓰일 때에는 원래적인 의미로 사용된다[55]. 전치사 evn 70인역에는 있으나 대다수의 바울 사본에는 없다. evmme,nein + (evn) + 대격분사 라는 형태에서 고대 법률정식(Rechtsformel)과의 연관을 어느 정도 엿볼 있게 한다[56].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이용한 70인역 본문은 어떤 것이였을까?" 대해 물을 있겠다. 70인역과 바울의 인용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판본을 사용했을 수도 있겠고, 기억에 의거한 까닭에 차이가 발생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바울 임의로 본문을 바꾸었을 수도 있겠다. 70인역 본문 중에서 P사본은 no,mou대신 bibli,ou 읽고 있고 Lucian auvtou,j대신 auvta 읽고 있는 사본에 따라 다양한 읽기가 있다는 점에서 바울이 70인역을 어떤 방식으로 인용했는 지를 밝히기란 쉽지 않다고 하겠다.

             27:15-26 구약학자 von Rad 따르면 세겜의 12계명 (금지조항)이며 이는 초기 여호와신앙의 정신과 제의적 형식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57]. 15-25 까지 11개의 저주들은 특정한 신적인 법의지를 위반한 것에 대해 다룬 것임에 비해, 12 저주는 (26) ' 율법의 모든 말씀들' 경시한데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앞의 저주들과 달리 26절은 부정적인 구성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후대의 권면적인 추가라고 있다[58].

             바울은 앞에서 지적한 처럼 무엇보다도 LXX 구절 " 율법의 모든 말씀들" (pa/sin toi/j lo,goij tou/ no,mou tou,tou) "율법의 책에 기록된 모든 " (pa/sin toi/j gegramme,noij[59] evn tw/| bibli,w| tou/ no,mou)으로 바꿈으로서, 27:26a 원래 의미 , "앞에서 언급한 11가지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을 받으리라" "율법 전체에 기록된 중에 하나라도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의미로 사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있는 ' 저주 하에 있다는 발언의 (10a) 근거로 삼고 있다. 이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여기서 인간이란 율법의 요구를 모두 지킬 없는 존재임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지않는가"라는 생각이 든다[60].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있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A)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C) 사이에 "인간은 율법을 지킬 없는 존재"(B)라는 사고가 생략되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의 여지를 주고 있다[61]. 이때의 논리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율법으로 있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A) 왜냐하면 인간을 율법의 요구를 행할 없는 존재이며(B), 성서에서 행하지 않으면 저주 하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C).

             하지만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 내용(B) 여기에 직접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있는 ' 저주 하에 있다는 말에 (10a) 대한 이유로 10b절의 내용은 불충분하다[62]. 또한 성서 어느 곳에서도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있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과연 바울의 이같은 발언 및 논리의 전개는 무엇을 뜻하는지 좀더 숙고가 필요하다.

 

D. 3:6-14

 

             "율법은 저주다"라는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이를 위해 우리의 본문 3:10 속해 있는 번째 Probatio(증명) (3,6-14) 시야를 확대해 필요가 있다. 단락의 (6-14) 처음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 아니라 ( 4:1)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서 ( 4:11,16f)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행위에 근거해 (evx e;rgwn)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예의 전형으로 ( 4:2ff), "의롭다 여겨지는 것은 할례와 상관없다" 예에서도 ( 4:10ff),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 좋은 모범으로서도 ( 4:18ff) 줄곧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3:6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이와 연관하여 (kaqw,j, a;ra) 믿음을 가진 이들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래서 의롭다고 여겨졌다". 이는 15:6 LXX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으로서,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자주 사용하는 구절이다 ( 4:3b,9b). 바울은 자신의 핵심단어인 '믿음' 설명할 , 아브라함을 내세우면서 "그는 다름아닌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진 "임을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임을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뒤에 바울은 신자 일반을 (oi` evk pi,stewj) 등장시키면서 이들이 아브라함과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한다. 바울은 여기서 선언적으로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다 (7). 이는 바울이 미리 갈라디아인들에게 알려준 내용으로 (ginw,skete) 4:11b 통해서도 있다[63]. , 바울은 성서에 근거하여 (1) 아브라함과 이방인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매개는 믿음이다. 믿음은 아브라함의 예에서 보듯이 사람을 의롭게 한다 ( 3:8b). (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를 통해 모든 이방인이 축복을 받는다" 약속을 했다 (8b). 그러므로 믿음에 의한 자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함께 축복을 받는다 (9). 이처럼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아브라함을 통한 이방인에 대한 축복이라는 가지를 구약에서 거 삼아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진 자는 그의 자손이고[64] 축복이 주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번째 Probatio의 전반부인 6-9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보듯이 믿음에 의한 자는 (oi` evk pi,stewj) 축복을 받는다 (euvlogou/ntai) 는 사실이다.

             이를 10a절과 비교해 보면, 바로 9절의 내용을 역으로 설명한 것이 10a절임을 있다[65]. 믿음은 축복과 연관된다는 견지에서 보면 믿음의 반대인 율법( 행위) 저주와 관련이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66]. 다시 말해 10a절은 구약에서 유래된 것도, 바울의 전혀 새로운 발언도 아닌, 앞에 나오는 진술을 부정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67]. 그리고 10b절은 비록 논리상 불완전하지만[68] 이에 대한 구약성서의 근거 역할을 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단지 율법과 관련하여 "저주"라는 말이 관련되어 있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라는 구절을 사용하고 있다[69].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있는 " 뜻은 율법의 계명들로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이를 행동의 척도로 삼는 자를 뜻한다. 따라서 율법의 지배를 받고 율법 아래에서의 삶을 사는 자를 의미한다. "율법 아래 (4:4 u`po. no,mon)"란 죄 아래의 삶이요[70] (3,22 u`po. a`marti,an),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의 삶이요 세상 초등학문 아래에 있는 상태이다 (4,2.3 u`po. evpitro,pouj kai. oivkono,mouj, u`po. ta. stoicei/a tou/ ko,smou)[71].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미 2:16에서  evx e;rgwn no,moudia. pi,stewj VIhsou/ Cristou/의 대비를 통해, 그리고 16d절의 모든 육체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선언을 통해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72].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은 축복의 반대인 저주 하에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있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는 발언에서는 그러나 바울은 아직 율법이 저주라고 하지는 않는다. 다른 편지에서 보면 율법 자체는 선하고 거룩한 것이라고 한다 ( 7:12,14,16). 하지만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되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처럼 믿는 자들은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볼 때, 믿음에 속한 것이 아닌 율법에 정위된 삶은 (축복의 반대인) 저주 하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73].

             바울이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행할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74] (갈라디아서 어디서도 이를 문제 삼고 있지 않다. 5:3 근거로 "바울에게는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주장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견해가 아닌 상대방의 논리를 역이용하여 이방인인 갈라디아인이 할례를 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75]),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인가"이며, 답은 '율법( 행위)' 아닌 '믿음'이다. 이는 앞에서도 (2:16) 밝힌 것으로 3:11a절에서도 다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율법 안에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따라서 11절은 '율법에 근거해 있는 ' 저주 하에 있다는 내용인 10절에 이은 계속적인 논증이다[76]. 11 처음의 o[ti와 뒤에 나오는 d/h/lon 을 통해[77]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는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1b절에서는 앞의 내용의 (11a) 근거가 되는[78] 2:4 인용이 접속사 o[ti 의해 등장한다. 2:4 1:17에서도 인용된 구절로서 바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이라는 복음이해의 핵심을 표현해주는 구약의 구절이다[79]. 맛소라 원문은 다음과 같다:  hy<x.yI Atn"Wma/B, qyDIc;w> ("의인은 그의 신실함 때문에 살것이다"). 70인역은 이를 o` de. di,kaioj evk pi,stew,j mou zh,setai 옮기고 있고, 바울은 여기서 de, mou를 빼고 자구 그대로 인용하였다. mou가 삭제됨으로서 evk pi,stew,j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 2:16c)[80]. evk pi,stew,jevx e;rgwn no,mou( 3:10a; 2:16c) 대비되는 표현으로, 인간이 살게 되는 것은 (zh,setai), 즉 구원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라는 것이다.

          de,[81] 시작하는 12절은 이를 더욱 분명히 한다: 사람은 믿음을 통해서만 사는 것인데, 율법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12a) 율법을 통해서는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율법이 어떤 것인 지는 18:5 인용을 통해 설명한다: 율법의 양태는 행해야 산다는 점에서 (o` poih,saj auvta. zh,setai evn auvtoi/j) 믿음과 다른 것이다 (12b). 내용은 바울이 여러 곳에서 피력했던 생각들과 일맥상통한다 ( 3:2,5; 4:2-5). 구원이란 이처럼 '율법의 행위' 아닌 '믿음' 통해서 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사건이다. 구원사건은 다름아닌 인간을 율법의 저주로 부터 해방시킨 사건이다 (13).

             13절은 10절과 달리 저주를 직접 율법과 연관시키고 있다: "율법의 저주" (kata,ra tou/ no,mou). 말은 4:15a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한다" 연관이 된다고 있다. 율법은 구원의 길인 믿음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축복이 아닌 저주를 인간에게 내린다 ( 2:15-3:12). 율법은 단지 죄를 알게 하고 ( 3:20b; 7:7) 인간으로 하여금 범법케 한다 (para,basij 4:15b; 3:19).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이제 믿음을 통한 구원의 관점에서 저주의 주체가 된다. 그리스도는 바로 율법의 저주로 부터 '우리'[82] 속량하신 분이다 (참고 3:20)[83]. 율법 하에 있는, 다시 말해 저주 하에 있어 노예의 상태인 인간을 구원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분은 자신이 스스로 저주가 됨으로써 (geno,menoj u`pe.r h`mw/n kata,ra 13a),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 사건의 중심에는 바로 십자가가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지는 인용문구 "기록된바 (ge,graptai)" 이끌어지는 13b절이 설명한다. 13b절은 범죄자의 교수형에 대한 법적 규정을 다룬 21:23 LXX 부분인용으로 여기서 바울은 70인역 원문 kekathrame,noj (아마도 27:26a 인용과 [ 3:10b] 맞추기 위해서) evpikata,ratoj 바꾸었고 u`po. qeou/ 생략하고 pa/j 다음에 o` 삽입하였다. 이 인용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죽음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사건이며[84], 이를 통해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인간을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행위의 (u`pe.r h`mw/n 13a; 참고 parado,ntoj e`auto.n u`pe.r evmou/ 2:20b) 결과는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14 2개의 i[na-목적절). 하나는 8f절에서 이미 말했던 것으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 까지 미치도록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영의 약속을[85] 받게 된다는 것이다[86].

             지금까지의 기술을 통해 얻은 주요한 결론을 가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6-9절의 긍정적인 진술과 (믿음에 관한) 이에 대한 ()으로서의 부정적인 진술은 (율법에 관한) 이제 (13f)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시 긍정적인 기술로 바뀐다: 믿음을 가진 자는 누구나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게 되었으나, 이것이 저주인 율법으로 인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이를 다시 가능케 하였다. (2) 3:10 "율법에 근거해 있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 말할 있는 근본적인 까닭은 10b절이 아니라 앞부분이나 (9) 뒤에서 (11-12) 찾아야 한다: 축복인 믿음의 (9) 반대가 율법이기 때문에 (11f; 참고 2,5) 율법에 근거하는 자는 저주 하에 있게 되는 것이다. (3) 쿰란문서 4QMMT C 27 근거해 , 바울의 용어 '율법의 행위'에서 행위(e;rga) '계명', '규정' 뜻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4) 그리고 10b절을 "인간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못지키기 때문에 27:28 따라 저주 하에 있다" 해석해서는 않된다. 여기에는 "인간이 율법을 지킬 없는 존재"라는 바울의 시각이 들어있지 않다. 다만 바울은 어떻하면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음과 대비시켜 설득력있게 제시하느냐에 관심을 쏟고 있다.

 

나오는

 

             율법주의적인 경향을 지닌 대적자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할례를 받고 율법 하의 삶을 살려는 유혹에 직면한 갈라디아인들에게 바울이 Propositio(주장)에서 ( 2:15-21) 제시한 "율법이냐, 믿음을 통해서냐" 문제는 (3:1-5), 그리고 번째 Probatio(증명)에서도 (3:6-14) 계속 다루어 지고 있다. 전반부 6-9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음에 주목하면서, 믿음을 매개로 이를 가진 자는 그의 자손이라고 한다. ,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기준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것인 '믿음' 의해서이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있는 대상이 크게 확대된다: "누구든지 믿음이 있으면 그의 자손이다". 언명은 다음 절에 (8) 나올 이방인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고 그를 의롭게 여겼듯이 믿음이 있으면 누구도 의롭다 여기시는 분이기에,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에게 하신 약속 처럼 이방인들을 축복까지 하셨다는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근거해서 축복을 받는다고 있다. , 보편적인 개념인 믿음을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과 그에게 하신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을 "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믿음을 가진 자는 축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상과 비교해 10-12절은 반대의 경우를 다룬다고 있다: 율법이란 믿음과 비교할 인간을 의롭게 하지 못하며 (11b 구약의 근거), 믿음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12b 구약에서 말하는 율법의 양태 제시). 바울은 따라서 단도직입적으로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 있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고 선언한다 (10b절의 불충분한 구약의 근거로 이를 지지). 이처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율법에 의지해 사는 삶이란 무엇을 뜻하는 지를 비교하며 설명한 후에 기독론의 입장에서 현재 믿음을 통해 사는 삶이란 율법의 지배로 부터 해방된 상태 임을 바울은 밝힌다. 율법은 믿음과 단순한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지 않다. 율법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극복되어진 것이다. 인간의 상태는 율법 하에, 저주 하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행위에 의해 해방되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심으로서 인간들을 저주에서 해방하신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대속적인 사건인지에 대한 구약인용을 통한 설명 13b). 이같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에 의해 축복은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고, "우리"에게는 영의 약속이 이루어 진다고 바울은 말한다. , 갈라디아인까지 포함하는 일반적 개념인 '이방인'에게 축복과, 그리고 바울과 믿음을 가진 모두에게 ("우리") 새로운 피조물 됨의 결정적인 증거인 영의 약속이 (참고 4:6; 5:18; 8:9) 이루어 진다고 한다.

             ,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 아니라 (그에게 하신 약속에 근거하여) 이방인까지도 의롭다 여기시는 분이시며 그들에게 축복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믿음을 가진 자면 누구에게나 축복이 주어진다. 이와 달리 믿음의 반대인, 행해야 사는 양태를 가진 율법에 근거해서 사는 사람은 저주 하에 있음을 주지 시킨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규정대로 행하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문' (to. gra,mma 고후 3:6) 율법의 계명들에 속박되어 지신의 삶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가 저주 하에 있다고 한다. 이유는 믿음과 반대요 (12) 그리스도와 반대인 (5:4)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하여 것이 (2:18) 율법이요, 그래서 이상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것이 (3:23ff 특별히 25) 바로 율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율법에 근거해서 살려는 자는 ("믿음 = 축복 vs 율법 = 저주" 도식에 의거하여 ) 저주 하에 있다고 여기지 않을 없는 것이다. 이같은 논거를 통해 바울은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닌 믿음임을 강조하고 있다.

 


Eine Untersuchung von Gal 3,10 (3,6-14)

 

Cho, Gwang-Ho

Part-time Lecturer

Dajeon Theological Seminary & College

Suwon, Korea

 

Diese Arbeit handelt von Gal 3,10 (3,6-14), bei dem um die Gesetz-Problematik geht, die als ein schweres Thema Pauli anzusehen ist. Durch die Untersuchung der Wendung 'Werke des Gesetzes' (in Anlehnung an Qumran-Text 4QMMT) ist zum Ergebnis gekommen, daß die Bedeutung von 'Werke des Gesetzes' nicht anders als Gebote der Tora ist.

Die erste Hälfte der Perikope (V 6-9) ist davon geredet, daß derjenige, der an Gott glaubt, unter Berufung auf die Verheißung Gottes zu Abraham gesegnet wird. Im Vergleich dazu handelt es sich bei der zweiten (V 10-14) um die Kehrseite davon, nämlich um denjenigen, der mit dem Gesetz weiter umgeht. Diesem gilt der Fluch Gottes, im Sinne davon, daß das Gesetz dem Glauben gegenübersteht, der zur Segnung Gottes führt (Glauben = Segnung vs. Gesetz = Fluch). Daraus ist zu schließen, daß V 10 nicht über die Unerfüllbarkeit des Gesetzes durch Menschen spricht. In V 6-14 konzentriert sich Paulus darauf: Wie soll er die Galater davon überzeugen, daß das Gesetz (im Gegensatz zum Glauben) nicht Heilweg ist.

Im Hinblick darauf ist folgendes zur Sprache zu kommen: Wer unter Berufung auf das Gesetz leben will, ist insofern unter dem Fluch, als er sich als Heilsweg auf das Gesetz stützt, mit dem man nicht gerechtfertigt wird, nicht als er das ganze Gesetz nicht halten kann und deshalb unter Berufung auf Dtn 26,27 verflucht wird.

 



[1] 예를 들면 H. Hübner, Gal 3,10 und die Herkunft des Paulus, KuD 19 (1973) 215-31 (이하 H. Hübner, Gal 3,10); Th.R. Schreiner, Is Perfect Obedience to the Law Possible? A Re-Examination of Galatians 3:10, JETS 27 (1984) 151-60 (이하 Th.R. Schreiner, Obedience); J.D.G. Dunn, Works of the Law and the Curse of the Law (Galatians 3.10-14), NTS 31 (1985) 523-42; Ch.D. Stanley, 'Under a Curse': A Fresh Reading of Galatians 3.10-14, NTS 36 (1990) 481-511 (이하 Ch.D. Stanley, Under a Curse); M. Cranford, The Possibility of perfect Obedience: Paul and an implied Premise in Galatians 3:10 and 5:3, NovT 36 (1994) 242-58 (이하 M. Cranford, Possibility); N. Young, Who's cursed-and Why? (Galatians 3:10-14), JBL 117 (1998) 79-92 (이하 N.H. Young, Who's cursed); W. Reinbold, Gal 3,6-14 und das Problem der Erfüllbarkeit des Gesetzes bei Paulus, ZNW 91 (2000) 91-106 (이하 W. Reinbold, Gal 3,6-14); 참고 J.B. Tyson, "Works of Law" in Galatians, JBL 88 (1969) 423-31 (이하 J.B. Tyson, Works); T.L. Donaldson, The 'Curse of the Law' and the Inclusion of the Gentiles: Galatians 3.13-14, NTS 32 (1986) 94-112 (이하 T.L. Donaldson, Curse); M. Bachmann, 4QMMT und Galaterbrief, yX[m hrwth und ERGA NOMOU, ZNW 89 (1998) 91-113 (이하 M. Bachmann, 4QMMT)

[2] 이렇게 생각하는 학자들과 그들의 저서, 논문에 관해서는 아래 56 보라. W. Reinbold 그의 논문 Gal 3,16-14 5에서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의 명단을 싣고 있다

[3] H. Schlier, Der Brief an die Galater, KEK 7, 61989 132f (이하 Schlier, KEK 7); W. Reinbold, Gal 3,6-14, 99f; 참고 E. Lohmeyer, Gesetzeswerke, in; ders., Probleme paulinischer Theologie, Darmstadt (1954) 31-74, 66f (이하 E. Lohmeyer, Gesetzeswerke); J.B. Tyson, Works, 425. 뒤의 사람은 구절에서 ( 3:10) "율법을 지킬 있는가 없는가" 바울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4] Kommentar zum Galaterbrief 1519, Calwer-Luther-Ausgabe 10, 1996 131f

[5] H.D. Betz, Der Galaterbrief. Ein Kommentar zum Brief des Apostels Paulus an die Gemeinden in Galatien, München 1988 (Orig.: Galatians, Philadelphia: Fortress, 1979) (이하 Betz, Galaterbrief), 61f.250

[6] 참고로 고대 편지 형식에 따라 갈라디아서를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1-5 편지서두, 1:6-11 Exordium (서설), 1:12-2:14 Narratio (진술), 2:15-21 Propositio (주장), 3:1-4:31 Probatio (증명), 5:1-6:10 Exhortatio (경고와 권고) 그리고 6:11-18 Conclusio (결론) 이다 (Betz, Galaterbrief, 57ff)

[7] Betz, Galaterbrief, 236f

[8] 단수 e;rgon no,mou 함께 사용된 경우는 신약에서 1 뿐이다 ( 2:15)

[9] '들음' '믿음' 간의 밀접한 관련성은 10:14에서 바울이 밝히고 있다

[10] 참고 E. De E. Burt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ICC, 1971 (= 1921), 167 (이하 Burton, ICC)

[11] M. Bachmann, 4QMMT, 99

[12] G. Bertram, Art. e;rga ktl., ThWNT 2, 633.640ff

[13] N.H. Young, Who's Cursed, 80 '행위' 부정적인 의미가 없다고 본다, 홍인규도 이에 동의한다 (I.-G. Hong, Does Paul misrepresent the jewish Law? Law and Covenant in Gal. 3:1-14, NovT 36 [1994] 174); 그러나 불트만은 "한다" 강조을 두고 율법을 행함으로써 인간은 자기의 의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바, 이것이 죄라고 본다. 따라서 '행함' 부정적인 의미로 파악한다 (R.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UTB 630, 91984, 264f)

[14] G. Bertram, Art. e;rga ktl., ThWNT 2, 642,36f

[15] J. Amir, Art. Gesetz II (Judentum), TRE 13 (1984) 52-58, 55,6ff

[16] 이와 달리 H. Räisänen (Paul and the Law, WUNT 29, 21987, 177) 대상의 속격으로 보고 "율법과의 일치 속에서 이루어진 행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17] 참고 E. Lohmeyer, Gesetzeswerke, 33ff. 73f

[18] E. Lohmeyer, Gesetzeswerke, 35 의하면 율법은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성질을 규정하는 규범(Norm)이다

[19] 참고 J.B. Tyson, Works, 424

[20] E. Lohmeyer, Gesetzeswerke, 38f; 그에 따르면 e;rga 개인 또는 민족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직무 (Dienst, Service)'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46.67).

[21] 이와 비슷한 예로서 E. Lohmayer (Gesetzeswerke, 40) Test Lev 19:1; Test Benj 5:3; Apk Bar VI 6:6 (57:2) 제시하고 있다

[22] M. Bachmann, 4QMMT, 91ff

[23] E. Qimron/ J. Strugnell, Qumran Cave 4, V Miqsat Ma'ase Ha-Torah (Oxford: Oxford Press, 1994 ) 63 (이하 E. Qimron/ J. Strugnell, Qumran Cave 4, V)

[24] E. Qimron/ J. Strugnell, Qumran Cave 4, V, 47

[25] E. Qimron/ J. Strugnell, Qumran Cave 4, V, 46 1

[26] E. Qimron/ J. Strugnell, Qumran Cave 4, V, 101f

[27] 단수 hX[mh 보통 일반적인 의미의 율법을 일컫는다 (E. Qimron/ J. Strugnell, Qumran Cave 4, V, 139)

[28] E. Qimron/ J. Strugnell, Qumran Cave 4, V, 103

[29] 외에 쿰란문서에서 단어 hX[m "계명" 의미하는 : 4Q174, 1-2 i 7; 1QS 6:18 (E. Qimron/ J. Strugnell, Qumran Cave 4, V 139); 참고 M. Bachmann, (4QMMT, 104f) 따르면 "행위", 또는 "율법의 행위" 유대교 관례 법규인 '할라카' 의미한다고 한다

[30] M. Abegg, Paul, »Works of the Law« and MMT, BArR 20 (1994), 53.55 (참고 J.D.G. Dunn, 4QMMT and Galatians, NTS 43 (1997) 147-153, 147 [이하 J.D.G. Dunn, 4QMMT]) 이제야 처음로 바울이 바를 이해할 있게 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4QMMT 신약연구에서 중요하다고 한다.

[31] '행위' 어떻게 마음에 새겨질 있는가? '행위' 여기서 '계명()' 뜻으로 읽혀져야 한다

[32] e;rga 여기서 no,moj 종류로서 (dia. poi,ou no,mouÈ) 뒤에 나오는 no,moj pi,stewj 동격의 위상을 지닌, 그러나 서로 대비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e;rga '행위' 보다는 율법의 일부인 '법령', '규례' 등의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33] 참고 M. Bachmann, 4QMMT, 110ff

[34] F. Büchsel, Art. avra, ktl., ThWNT 1, 449-52, 449,19ff

[35] Burton, ICC, 164.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이외에 6:4D에서 나온다

[36] 참고 "교만하면 저주를 받으며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꾸짖나니" 118:21 LXX

[37] D. Lührmann, Der Brief an die Galater, ZBK.NT 7, 21988, 55 (이하 Lührmann, ZBK.NT 7)

[38] 단어는 신약에서 단지 여기서만 사용되고 있다

[39] 참고 Burton, ICC, 164

[40] F. Büchsel, Art. avra, ktl., ThWNT 1, 450,31

[41] Betz, Galaterbrief, 261 접속사 ga,r W. Bauer, Griechisch-deutsches Wörterbuch zu den Schriften des Neuen Testaments und der frühchristlichen Literatur, Berlin u New York 61988 (이하 W. Bauer, Wb) s.v. 3-4 뜻에 해당한다고 본다 ("folgend 다음으로 이어지는", "anknüpfend und fortführend 연결되어 계속되는")

[42] 전치사 evx "auf Grund von", "infolge" 의미이다 (W. Bauer, Wb, s.v. 3.f )

[43] 개역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표준새번역은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으로, 공동번역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 으로 각각 번역한다

[44] 관계사(Korrelativ) o[soi 여기서 절대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alle, die" (W. Bauer, Wb, s.v. 2); Ch. Stanley, Under a Curse, 498 따르면 o[soi 관사 oi` 보다 "불특정성", "가능성"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45] W. Bauer, Wb, s.v. 3.f "auf Grund von", "infolge"

[46] Burton, ICC, 164

[47] J.B. Lightfoot, The Epistle of St. Paul to the Galatians, (Michigan: Zondervan House, 1957) (= 1865), 138 (이하 Lightfoot, Galatians), 138

[48] Betz, Galaterbrief, 261

[49] Schlier, KEK 7, 132

[50] 이에 대한 자세한 뜻은 아래에서 (II.D) 다시 다룬다

[51] F. Mußner, Der Galaterbrief, HThK 9, 51988, 347 (이하 Mußner, HThK 9)

[52] 참고 R. Bring, Der Brief des Paulus an die Galater, Berlin u.a. 1968, 114.206f; M. Bachmann, 4QMMT, 112 104

[53] pa/sin 예외 없는 율법준수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sam. Targum; LvR. 25; pSota 7,21d,6 등에는 있다 (참고 Str.-B 3, 541)

[54] M. Bachmann, 4QMMT, 111에서 e;rga(10a), ta. gegramme,na (10b), auvta,(10b, 12b) 서로 구문론적으로 긴밀히 연결된다고 본다

[55] F. Blass/A. Debrunner/F. Rehkopf, Grammatik des neutestamentlichen Griechisch, Göttingen 171990  §202, §2023 (이하 Bl-D)

[56] W. Bauer, Wb, s.v.; F. Hauck, Art. me,nw ktl., ThWNT 4, 578-93, 581,29ff; 참고 Schlier, KEK 7, 132 Anm.7

[57] G.v. Rad, Rad, Das fünfte Buch Mose Deuteronomium, ATD 8 1964, 119 (이하 Rad, ATD 8)

[58] Rad, ATD 8, 119f

[59] D.-A. Koch, Die Schrift als Zeugnis des Evangeliums, Untersuchungen zur Verwendung und zum Verständnis der Schrift bei Paulus, BHTh 69 1986, 163-65 27:26 gegramme,noij evn tw/| bibli,w| tou/ no,mou tou,tou 연결시킴으로써 의문(Schrift) 문자임을 ('' 반대로서 2:27,29; 7:6; 고후 3:6f)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참고 Schlier, KEK 7, 132

[60] 예를 들면 H.-J. Schoeps, Paulus. Die Theologie des Apostels im Lichte der jüdischen Religionsgeschichte, Tübingen 1959, 183f; U. Luz, Das Geschichtsverständnis des Paulus, BEvTh 49, 1968, 149f (이하 U. Luz, Geschichtsverständnis); 또한 H. Hübner, Das Gesetz bei Paulus. Ein Beitrag zum Werden der paulinischen Theologie, FRLANT 119, 31982 20.26.39 3:10 인간이란 율법을 지킬 없는 존재임을 반영하는 바울의 대표적인 구절로 이해한다. 외에도 H.Lietzmann, An die Galaterbrief, HNT 3, 1910, 241; A. Oepke, Der Brief des Paulus an die Galater, ThHK 9, 41979, 105; J. Rohde, Der Brief des Paulus an die Galater, ThHK 9, 1989, 141 (이하 Rohde, ThHK 9); Mußner, HThK 9, 225f; Lightfoot, Galatians, 137; Burton, ICC, 164; 홍인규, 바울의 율법과 복음,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 74; 김창락, 갈라디아서 (대한기독교서회 창립100주년기념 성서주석 38),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38, 278 (이하 김창락, 100주년주석 38); 나요섭, 갈라디아서. 십자가의 복음서, (서울: 한들, 1999) 264ff. 281 등이 이에 동의한다

[61] Th.R. Schreiner, Obedience, 151; M. Cranford, Possibility, 244 6; N.H. Young, Who's cursed, 81f; Burton, ICC, 164 여기서 바울이 인간이란 율법의 요구를 지킬 없는 존재임을 전제하고 있다고 본다; Lightfoot (Galatians, 137f) 10 이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긍정적인 증명을 보인 후에 그것의 반대, 율법으로 인한 의인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부정적인 논증에 의해 그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한다. 부정적인 논증은 가지 점으로 되어 있다. 첫째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이루지 않으면 저주 하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율법으 정신은 다른 곳에서 보면 (11-12) 생명의 원천으로 일컬어지는 믿음과 반대이다

[62] Lührmann, ZBK.NT 7, 55 10절을 논리적으로 난해한 구절이라고 한다

[63] 아브라함의 경우에 무할례시 믿음으로 된 의를 위해 인친 것이 바로 할례인데, 이는 아브라함이 무할례자로서 믿는 자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 4:11f)

[64] 이는 약속이 그의 후손에 주어졌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65] 참고 Betz, Galaterbrief, 261

[66] 단어 '축복' 많은 경우 '저주' 함께 사용되고 있음은 앞에서 이미 지적하였다. 참고 Schlier, KEK 7, 132

[67] 참고 Burton (ICC, 163) 10절을 대적자를 논박하기 위한 새로운 무기로서 e contratio[반대에서 나온] 논증이라고 한다

[68] 참고 Lührmann, ZBK.NT 7, 55

[69] E.P. Sanders (김진영 ), 바울, 율법, 유대인,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47f; 참고 W. Reinbold, Gal 3,6-14, 100

[70] Schlier, KEK 7, 132 2 u`po. kata,ran u`po. no,mon ( 4:4; 5:18; 6:14) 같은 뜻이라고 본다

[71] F. Vouga, An die Galater, HNT 10, 1998 74 (이하 Vouga, HNT 10)

[72] 바울은 이에 대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다만 도그마적으로 이를 전제한다 (E. Lohmeyer, Gesetzeswerde, 66; Tyson, , 426; 참고 Vouga, HNT 10, 70f)

[73] U. Luz 이런 의미에서 10절을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U. Luz, Geschichtsverständnis, 151). 이와 관련된 구절로 3:22 있다. 이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사건을 전제로 하고 반추했을 , 성서는 모두를 아래 가두었고 (22a), 결과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지게 것처럼 (22b) 율법은 단지 죄를 알게 하고 ( 3:20) 인간을 저주 하에 있게 한다 ( 3:10b). 이런 역할은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이 그리스도로 부터 구원받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하는 몽학선생이다 (3:24)

[74] W. Reinbold, Gal 3,6-14, 99; M. Cranford, Possibility, 249

[75] Betz, Galaterbrief, 445f; 김창락, 100주년주석 38, 357; 참고 Rohde, Rohde, ThHK 9, 215

[76] 11절의 처음 o[ti d/e, d/e, Burton, ICC, 164 추가적인 논증으로, Betz, Galaterbrief, 266 계속 사고가 진행된다는 의미로 본다. 이에 달리  Schlier, KEK 7, 133 단순히 10절의 병행으로, Vouga, HNT 10, 74 10절의 대비로 본다

[77] Bl-D §39712, Vouga, HNT 10, 74; Betz, Galaterbrief, 265

[78] H. Hanse, DHLON (Zu Gal 3,11), ZNW 34 (1935) 299-303, 302; Burton, ICC, 166; Vouga, HNT 10, 74

[79] 참고 Burton, ICC, 166

[80] Betz, Galaterbrief, 266; 참고 Vouga, HNT 10, 75

[81] 여기서 de, 11절의 de, 이어 논거가 계속 됨을 의미한다 (Betz, Galaterbrief, 263, 84)

[82]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로 부터 속량해 낸 '우리'는 율법으로 부터 있으려 한 자들이므로 (10a) 유대그리스도인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 2,15). 반면 갈라디아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신앙을 갖기 전에 '율법 아래'가 아닌 '세상의 초등학문 아' 있었다고 (4:3) 볼 수 있다 (Betz, Galaterbrief, 269). (참고 Schlier, KEK 7, 136f. Schlier '우리'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갈 4:3-5에서 세상의 초등학문 하에 있는 '우리'(3) 바로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 다름아닌 그리스도에 의해 아들의 영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우리'를 일방적으로 유대-그리스도인 혹은 이방-그리스도인 한편으로만 볼 수 없다고 하겠다

[83] '속량하다 (evxhgo,rasen)' 이곳과 4:5에서 나온다. 뜻은 노예가 자신의 몸값을 주인에게 내고 자유인이 (신이 주인에게 돈을 주고 노예를 사는 형식을 취한다) 사용되어진 동사 avgora,zein과 유사하다 F. Büchsel, Art. avgora,zw ktl., ThWNT 1, 125-28, 125,3ff; 126,29f; Vouga, HNT 10, 75 동사 evxhgo,rasen 뜻을 크게 봤을 5:1 "자유케 하다    (hvleuqe,rwsen)" 비슷하다고 본다

[84] 참고 4:4 " 여인으로 부터 나시고 율법 아래 " (geno,menon evk gunaiko,j( geno,menon u`po. no,mon)

[85] 몇몇 사본에서는 (¸46 a D*.c F G pc b vgms McionT Ambst) "약속" (evpaggeli,an) 대신 "축복" (euvlogi,an)으로 읽는다. 후자를 지지하는 사본들이 좋은 읽기 들이며 단어 evpaggeli,an 다음 단락에서 핵심단어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16,17,18,19,21 ) N-A27 본문으로 택한 evpaggeli,an 원문이라고 하겠다. "영의 약속" 2:33 등의 예를 제시하면서 W. Bauer, Wb, s.v. 2.b; Schlier, KEK 7, 140f; Betz, Galaterbrief, 276, 136 등은 "약속된 , "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86] 번째 목적절과 번째 것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병행관계 (Vouga, HNT 10, 77; Burton, ICC, 176), 후자는 전자를 전제한다 (Betz, Galaterbrief, 276), 후자가 전자를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서로 보완하고 있다 (Schlier, KEK 7, 140). 또한 주목할 것은 번째 목적절에서 주어가 1인칭 복수 "우리"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14b). 유대인이 성령을 받는 것이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는 것에 대한 조건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 유대-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Vouga, HNT 10, 75.77; Burton, ICC, 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