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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행'은 '눅'의 후편

사도행전은 지난 글에서 ('바울의 선교여행' 99년 11월 21일)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누가복음의 후편입니다. 이는 눅 1,1이하와 행 1,1을 비교해 보면 확인됩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 그 모든 일을 ... 자세히 ... 데오빌로 각하에게 ... 써 보내는 것이 ...",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따라서 행은 누가복음의 그 다음 이야기, 즉 예수의 승천 후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어떻게 퍼져나가는 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 시기, 저술장소

그러므로 행을 쓴 이는 누가복음의 저자와 동일인이다. 전통적으로 바울의 동역자였고 의사였던 (골 4,14; 몬 24절) 누가를 지은이로 본다. 하지만 이 사람이 행을 썼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바울의 동역자라면 바울의 신학, 즉 의인론이나 십자가 신학등을 잘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텐데 행에는 그런 사상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또한 바울서신에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모습과 행에서 그려지고 있는 바울의 모습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행의 저자는 바울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으며 바울의 편지를 접하지 못한 어떤 인물이다 (혹자는 행의 저자가 바울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신학적 목적을 위해 나름대로, 즉 바울서신의 내용과 달리, 행을 썼다고 보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열린연구'는 눅과 행의 저자를 계속 '누가'라고 칭한다).
     저술시기는 대략 80-90년 혹은 90-100년 사이도 가능하다고 본다. 어디서 쓰여졌는지 분명치 않다. 로마, 안디옥, 에베소, 마케도니아, 아가야, 소아시아 등등 의견이 분분하다.

행은 신학적인 저술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의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마음 속에 그리려 할 때, 예를 들면 '바울'이라고 할 때 사도행전의 바울과 바울 서신의 바울에 관한 자료를 모두 동원하여 '바울'이라는 한 그림을 그립니다. 혹은 '예수'라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려고 할 때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모든 기사를 모아 어떤 한 모습을 만듭니다. 물론 바울도 예수님도 여럿이 아니라 한 명, 한 분임으로 통일된, 일관된 어떤 모습, 상이 있을 것이고, 또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서로 다른 서술들을 (그것의 상황이나 각 저자의 톡특한 복음의 이해방식을) 검토하고 비교해 보지 않고 그냥 모자이크식으로 엮어 어떤 결론을 도출해서는 않됩니다.
     사도행전의 바울은 설교도 잘하고 많은 기적도 행하고 아주 능력이 있는 인물입니다. 반면 바울 자신의 편지에서는 외모도 언변도 형편없다고 되어있습니다 (고후 10,10; 11,6).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누누히 강조합니다 그러나 행에서 이 말은 12제자에 국한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14,4.14에서 바울을 사도라고 합니다 (그것도 바나바와 바울을 통칭해서 "두 사도"로). 이런 점도 바울의 모습이 행과 바울서신에서 각기 달리 그려지고 있다는 한 예일 것입니다. (각 복음서에서 예수의 상이 서로 다름은 '복음서'란의 '마태복음에 관한 글들'에서 이미 거론했습니다. 또한 '신약성서입문'의 글 중 '성서형성원리'의 II.2를 보십시요 )
     행에 나오는 바울은 누가의 관심, 그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이해되고 묘사된 바울입니다. 따라서 실제 역사적인 바울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도행전이 초대기독교사의 전부이고, 마치 다큐멘타리처럼 어느 한 사람이 바울의 여행을 따라 다니면서, 혹은 당시 기독교의 전파, 발전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를 기록으로 남겨서, 실제 당시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해 주고 있다고 봐서도 안됩니다. 물론 행의 많은 부분, 내용들은 초대교회사를 재구성하는 데 많은 자료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의 신학에서 본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당시의 신문스크랩이나 역사책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성서 입문' 중 '성서를 읽을 때 4가지 원칙' 가운데 첫 번째를 참고하십시오). 그러므로 행의 내용을 잘 이해하려면 저자 누가의 관심, 특별히 신학적인 관심이 무엇인 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자 누가의 관심

행은 매우 도식적으로 쓰여졌습니다: 1-5장까지 예루살렘교회 이야기, 6-12장 유대와 사마리아 선교, 그리고 13-28장의 바울에 의한 세계선교. 이런 도식은 그의 특별한 관심사와 말접한 관련이 있다.
     이미 지난 번 에 말한 바와 같이 행의 저자 누가는 '때'와 관련해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때의 중간"으로 이해했다. 즉,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시대에 이은 예수님의 시대는 구원이 도래하기 시작하는 시대이다. 구속의 역사는 승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구약의 시대와 재림으로 끝나는 역사의 마지막 때, 이 둘 사이에 누가 자신이 속한 현재의 때가 위치한다. 그래서 이 때는 '중간의 때'이다.
     누가는 예수나 예수의 당대 제자들, 증인들과는 달리 재림이 곧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임박한 재림의식이 누가 당대에는 그 열기가 많이 식었다. 물론 학자 큄멜의 지적처럼 (Einleitung, 138이하) 임박한 종말을 의미하는 구절들이 행에 계속 나오고 있다. 2,17에서 요엘 3,1의 구절을 "말세"라는 말을 추가해 더욱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3,20이하, 15,16이하 참고). 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묘사 (10,42; 17,31) 하여 부활에 이미 종말의 심판 사상이 들어가 있다든가, 또 14,,22의 구절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의 고난을 종말과 연관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이 재림지연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신학적으로 접근한다 (참고 1,7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그리고는 자신의 때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사이의 때로,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세상 끝까지 퍼가 나가는 때로 보았다. 이때는 성령강림을 통해, 성령의 역사하시는 때요, 교회가 중심이 되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때이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눅 24,47이하와 행 1,8을 읽으면 누가복음에 이어 후편으로 행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복음이 땅 끝까지 퍼져나가는 과정의 묘사 중 몇 가지 특징

1. 복음전파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다. 오순절 사건도 여기서 일어난다 (참고로 바울 자신은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은 회심한 후 3년 후에야 예루살렘에, 그것도 잠깐 올라갔다). 이 성령강림 사건 후 우선 예루살렘 내에서 선교활동이 이루어진다.
     앞으로의 모든 선교도 예루살렘교회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사마리아 선교는 빌립이 (7집사 중의 하나인) 처음으로 하는데 (8장) 중간에 (14-25절)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서 이 선교에 간여한다. 즉, 행에 따르면 사마리아 선교도 예루살렘교회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2. 12제자 중심: 우선 가롯 유다 대신 맛디아가 선출되어 (1장), 이들 중심으로 첫 선교활동이 이루어지고 (2-7장), 7집사들은 이들의 지휘를 받는 것으로 서술된다 (6,3이하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일곱집사들은 12사도와 마찬가지로 복음도 전하고 능력도 행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12사도가 예루살렘교회[들] 내 유대인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들임에 반해)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라고 본다. 즉, 예루살렘 내에는 언어상의 문제로 주로 헬라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초대공동체와 유대인들이 모인 공동체가 있었다고 본다.
     이방인 선교도 첫 시작은 12제자 중 하나인 베드로에 의해서이다 (고넬료 회심 8장). 고전 15,5이하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인물 부류들이 나온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났느냐가 제자됨의 아주 중요한 전거임을 고려할 때 (참고 고전 15,8; 9,1) 여기에 나오는 부류들은 초대교회사에 아주 주요한 비중을 차지했으리라 쉽게 짐작이 간다: 베드로, 12제자, 500여 형제, 야고보, 사도들, 그리고 바울. 즉, 행의 도식적인 묘사처럼 12 사도만이 초대기독교사의 중심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3. 선교의 대상은 우선 유대인 먼저, 다음으로 이방인이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 내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가 이루어지고, 다음으로 사마리아 선교 (8장), 그리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됨을 시발로 안디옥에서의 복음전파 (11장), 바울의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여행 이야기가 나온다. (13장 이하). (이와 달리 바울은 처음부터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한다. 갈 1,16; 롬 15,16)

행에 나타난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완화 문제

일찍이 1838년 F.C. Bauer는 행은 유대교와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있는 바울편지와 달리 유대교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한다고 관찰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런 경향은 행이 후대에 쓰여진 것이라는 증거로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유대교와의 첨예한 대립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에 기인한다. 더나가 그는 1845년에 행을 바울과 베드로의 대립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2세기의 작품으로 보고 따라서 행의 기사는 왜곡된 초대교회사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바우어의 주장에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의 중요한 관찰, 바울서신의 내용과 행의 서술 간의 차이는 행이 통일적인 초대교회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 그 주 원인이 있는 바 (행의 여러 곳에서 보여지듯이 예루살렘 교회의 주도 하에 복음이 땅 끝까지 퍼져나가고, 이에 있어서 이방인의 사도 바울도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예루살렘교회와의 완벽한 협동관계에 있다), 이런 경향은 초기 속사도시대의 이방기독교 세계가 가졌던 견해라는 것은 부인되지 않고 있다.
      1870년 F. Overbeck도 이런 바우어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더 나가 그는 행에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서로 별 대립이 없었던 것처럼 기술 된 것은 기독교를 당시 이방세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정치적인 혐의에서 (즉, 기독교의 세계선교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다)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J. Weiss도 이와 유사하게 생각하였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선교가 본격화되면서 자연 기독교는 유대교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구원사, 구속사가 파괴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생겨났다. 그리고 로마당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인정을 받던 유대교와 분리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병역이 면제되었다) 그리고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가 당국으로부터 "시정에 위해한 무리들"이라고 낙인찍히지 않을까, 혹은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당시 있었는 데, 행은 이런 우려를 염두에 두며 쓰여졌다고 본다. 그래서 행에는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종교가 아님이 강조된다 (기독교 내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조화), 이방인 선교도 12사도는 원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시켜서 시작되었고 (베드로에 의한 고넬료의 개종),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으나 그들이 거부해서 부득불 이방인선교가 시작되었다고 서술된다. 더 나가 하나님은 특정한 한 민족이 아니라 모든 나라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10,34이하). 이런 입장에서 행에서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이로, 그리고 이방인들도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로마 당국을 우호적인 모습으로 묘사한다 (야손의 모함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행 17,6이하 [참고 24,5]에 대해 바울은 25,8에서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서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행에 의하면 당국은 기독교인에게나 바울에게 무죄를 선언한다 (16,39; 18,15이하; 19,37; 23,29; 25,25; 26,32). 바울은 로마에서 당국으로부터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한다 (28,30이하). 당국에 대한 이런 태도는 전편인 눅가복음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행은 당시 이방세계에 퍼져있는 오해를 불식시킨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귀의하는데 장애물을 제거한다.

한편 큄멜의 주장처럼 (Einleitung, 131) 행에는 둘 간의 조화가 아닌 기독교와 유대교를 비교, 대립시키면서 구약의 하나님의 계시를 참되게 상속한 것는 기독교임을 강조함으로써 (26,6이하.22이하; 28,28) 이방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선택하도록 권유하는 측면도 있다.

행에 나타나는 독특한 서술형태들

(끝으로 전문적이긴 하지만 참고로 말하면) 행은 초대교회나 바울보다 후대의 작품이다. 따라서 행의 저자는 그 당시 존재했던 여러 자료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이용했을 것이다 ('어떤 식'이 과연 무엇을 뜻한는 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어찌되었거나 행에서 이와 관련되는 문학적, 문체적으로 독특한 서술형태들이 확인된다. 예를 들면

1. '우리'로 서술되는 부분들 16,10-17 (40); 20,5-15; 21,1-18; 27,1-28,16. 이 부분은 드로아와 관련해서 시작되어 (16,10) 바울이 빌립보에서 활동할 때까지 나타나다가 아가야지역 여행 후 다시 드로아로 오는 부분에서 (20,5이하) 다사 등장한다. 따라서 행의 저자 누가가 드로아에서 바울을 만나 빌립보까지 동행, 거기서 어떤 이유로 그는 남았다가 귀환하는 바울을 다시 만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나 엄밀히 말해 '우리'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는 시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에 머물고 있을 때 종결되며 빌립보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감옥에 갖힌 바울과 실라가 지진으로 풀려난다) 매우 기적적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실제 목격자의 서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이 '우리'로 서술된 부분은 누가에 의한 것이 아닌 다른 증인의 기술을 그대로 사용한 것일 수 도 있다. 혹은 이 부분이 어떤 자료나 다른 증인에 의한 보고가 아닌, 독자들에게 사건을 생생히 묘사하기 위한 누가 자신의 문학적인 창작물일 수도 있다.

2. 연설들: 스데반의 연설 7장, 베드로의 선교연설 2,14이하; 3,12이하; 4,9이하; 5,30이하; 10,34이하, 바울의 연설, 이방인에게 14,15이하; 17,22이하, 기독인들에게 20,18이하,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 22,1이하, 26,2이하, 로마에서의 연설 28,25이하. 이 연설들은 (특별히 베드로의 연설 7장과 바울의 연설 13장) 비록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른 상황에서 행했지만 같은 도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구약을 연관시킴, 기독론적인 선포, 구약의 구절을 증거로 듦, [회개촉구와 함께] 구원을 선포)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3. 총괄적인 형태의 언명들 2,42-47; 4,32-35; 5,12-16

4. 혹자는 (하르낙이 그 창시자) 행에 (특별히 행의 전반부에) 서로 병행되는 두 자료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소위 예루살렘-가이사랴 자료라고 불리우고 선교사 빌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당시 역사에 상당히 근접해있는 자료 (3,1-5,16; 8,5-40; 9,31-11,18; 12,1-23)와 이에 반해 역사적 정황과 상당히 떨어져 있는 자료 (2; 5,17-42). 이와 별개로 역시 실제 역사에 밀접한 연관이 있고 전도자 실라가 그 원작자라고 보는 안디옥-예루살렘 자료 (6,1-8,4; 11,19-30; 12,25-15,35)가 거론되어지기도 한다.

맺으면서

행에 나오는 초대교회사와 관련된 서술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이 서술들은 상당부분 저자 누가의 신학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사와 관련 행을 사용할 때, 무비판적으로 사용해서는 않된다.
     행은 명확한 신학적인 역사이해를 갖고있다. 이를 가지고 행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인물들에 의해 (12제자이건 사도 바울이건 간에)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와 함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들을 감동적으로생생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이방인으로 땅 끝에 살았던 우리들, 그리고 복음화되어 이 복음전파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우리에게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큰 힘을 제공하고 있는 성서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 특히 사랑을 받고 있는 성서의 한 책이다.

(사도행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99.12.0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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